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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유 Aug 02. 2023

마중

들에서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 엄마가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다.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을 아이들. 심통이 난 나는 버스가 멀어지고 나서야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오지 그게 뭐냐고 우산도 받지 않고 휑하니 앞장서 걸었다. 언제나 앞서 걷던 엄마는 그날 한 번도 앞에 서지 않았다. 성질머리 하고는, 타박도 하지 않았다. 마을 하나 지나고 고개 하나 넘은 뒤 제풀에 마음 순해져 뭐 하고 있었냐고 뒤돌아 물은 듯도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마을을 세 개나 지나고 굽이굽이 한 시간여를 걸어야 하는 길. 그날 무슨 얘기를 하며 집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는 길에 비가 멈췄고 우산을 접고 걸었다는 것, 점점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한 발 한 발 더해가는 부끄러움에 소리 내 울고 싶어졌다는 것만은 뚜렷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 장면이 찔리던 나는 어느 날 나란히 누운 잠자리에서 혹시 그날의 기억이 있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기억나지 않았을까.

“엄마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 미안해~.” 

어리광 부리며 엄마를 끌어안았지만 이후에도 그 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는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밭에서 논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했고 세심하게 자식 하교시간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날도 헐렁한 몸뻬바지를 입고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리라.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빈 몸으로 간 딸을 위해 급히 우산을 챙겨 조바심치며 먼 길을 걸어 나왔으리라. 한창 외모에 신경 쓰던 열일곱 살이었다는 것도, 그 버스 안에 내가 몰래 좋아하던 남학생이 타고 있었다는 것도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기다리는 사람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지지대인지, 그들이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 않을 때 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파트 입구에 노란 어린이집 차가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아이들이 작은 발을 떼며 마중 나온 이들의 손을 잡고 간다. 

나도 찰박찰박 하늘 물길 딛고 마중 나온 늙은 엄마의 젖은 손을 꼬옥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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