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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유 Aug 02. 2023

키질 소리

탁, 탁, 탁.


깨를 턴다. 해 그늘 길어 늦게 여문 깨 거꾸로 모아 쥐고 터는데 단단히 여물지 못했나, 제대로 말리지 못 했나, 시원히 털리질 않는다. 꼬투리까지 떨어질라 나도 깨도 허리가 비틀어지고 있는데 독하다고, 제 것만 안다고 동네 사람들 뒷말 무성한 아랫집 할매, 잰걸음에 달려와 깻단을 집어 든다.

“비 온단다.”


할매는 허리가 기역자(ㄱ)로 굽은 꼬부랑 할머니. 지팡이도 짚지 않고 버스 타고 읍내 시장도 가고 병원도 간다. 시골길 비탈길에 고꾸라질까 걱정인데 젊은 것들 벌러덩 엉덩방아 찧는 빙판길에서도 끄떡없다. 개울 건너 놀던 밭 빌려 고추농사도 실하게 짓는다. 눈이 녹고 땅이 풀리면 굽은 등에 퇴비 포대 아기처럼 업고 한 발 한 발 밭으로 간다. 쇠스랑과 호미로 흙을 일궈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워 고추를 심는다. 습해를 많이 입는 고추농사, 장마철 비가 쉴 때마다 무거운 농약 통 지고 고추밭으로 간다. 

어느 해에는 심은 지 얼마 안 된 고추 묘가 자라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할매는 매일매일 개울로 내려가 물을 떠 날랐다. 보는 이들마다 이번 고추 농사는 끝났다 했지만 할매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둑한 새벽부터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할매의 정성을 알았을까. 고추 묘들은  뿌리를 내리고 힘을 받아 아우성치듯 무성하게 자라났다. 가을이 오자 할매는 두툼하고 빨간 고추를 따서 이것 봐라, 하듯 길옆 양지에 널어놓고 말렸다. 고추들은 붉은 해를 품고 바삭바삭 부각 소리를 냈다.  


할매는 마을 회관에도 가지 않는다. 동년배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왁자하게 놀 때도 할매는 집에서 달그락달그락 뭔가를 하고 있다. 남편 잃고 어린 형제 끌어안고 들어온 산촌 오십 년, 사내 없는 농사일 일꾼 구하느라 얼마나 바장댔을까. 

“성님도 이제는 자리 잡은 아들들 덕 좀 봐요, 악착같이 일만 하지 말구요.” 

동서들 말에 할매는 대꾸도 않는다. 봄이면 냉이와 씀바귀를 캐고 쑥과 산나물을 뜯어 삶고 여름이면 옥수수를, 가을이면 안개 길 더듬어 주운 알밤 바리바리 싸놓고 아들들을 부른다. 큰길가에 둥글게 둥글게 놓인 보따리들, 짐칸과 뒷좌석에까지 싣고 아들 차는 떠난다. 


좁은 논둑길 걸어가야 있는 집. 방 한 칸, 부엌 한 칸, 봉당 높은 할매 집. 집은 할매의 뼈처럼 기울어지고 굽어지고 휘어졌다. 할매는 끼익끼익 우물펌프 물 퍼서 밥을 짓는다. 옛 외양간과 화장실이 있는 햇볕 좋은 부속채 벽에 빨랫줄 묶어 손빨래한 옷들을 말린다. 회벽에 피어나는 빨간 꽃, 노란 꽃, 보라 꽃. 할매는 평생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을 가진 적 없다. 집도 터도 할매네 것이 아니다. 슬레이트 지붕은 한 해 한 해 낮아지고 연기 솟은 지 오래인 굴뚝은 조금씩 옆으로 기울고 있지만 그 집에서 죽겠다는 할매는 도시로 가자는 아들들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고 있다.  


할매 집 옆 뜰에는 커다란 고욤나무가 있다. 늦가을 잎 떨어진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욤. 참새와 까치들이 몰려와 며칠이고 푸짐한 잔치를 벌이는, 크기는 작고 씨는 커서 씹는 만큼의 실속은 없지만 작은 곶감처럼 달고 쫀득쫀득한 고욤. 바가지에 고욤을 주워 문을 두드리던 할매. 오래 전, 가슴에 묻은 딸 생각이 났을까.  

가는 귀 먹은 할매가 서툴게 들깨 터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젖은 손, 접힌 옷소매. 날이 꾸물꾸물 어두워지니 금방이라도 비 쏟아질까 걱정되어 물일 하던 손 급히 거두어 달려온 게다.  키질하는 할매 옆에 어정쩡히 서서 염색약 벗겨진 할매의 흰 머리 내려다보는데, 키 가져와라 깨 골라주듯 누군가의 슬픔 자르르 털어낸 적 있나, 나는. 실 뭉치 같은 울음 끌려나오지 못하고 쿨럭쿨럭 목에 걸린다. 

차아악- 차아악-. 할매의 칠십 년 키질 소리. 오래된 할매의 악기가 어디 키 뿐일까. 늙은 연주자는 능숙하고 부드럽고 정갈하다. 여문 낱알 하나 떨구어지지 않는 깔끔함. 차아악- 차아악-. 검은 나무뿌리 같은 손끝 빚어내는 수천 년 키질 소리가 마당을 내려가 마을을 돌아 산등성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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