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유 Sep 06. 2023

달(2)

제24회 전원생활 수기 공모 우수작(2023.03)

산 속의 논을 일궈놓은 걸 보고 사람들은 멧돼지나 고라니 때문에 호박이나 들깨밖에 안 될 것이라 걱정했다. 나무를 심어도 잎은 고라니가 먹고 뿌리는 멧돼지가 파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렇다고 구불구불 이백 미터나 되는 경계에 고라니 망을 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걱정은 폭우였다. 계곡이라 장마철이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의 양이 엄청났고 평소에는 바닥에 졸졸 흐르던 개울물이 흙탕물로 넘치는 것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물길을 넓게 내달라 했고 둑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옛날 어른들이 했던 대로 개나리와 조팝을 뚝뚝 꺾어 토지 경계 전체에 꽂았다. 적당하게 내린 봄비로 개나리는 꽃을 피우고 잎을 냈다. 조팝에도 뾰족뾰족 새싹이 돋았다.  


자식은 부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엄마에게서, 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더 많았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외출하셨던 아버지께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엄마가 울면서 어째, 어째, 하던 밤이 떠오른다. 나는 열두 살이었다.

아버지는 무섭고 엄했다. 잘못하면 사랑방으로 불려가 바지를 걷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그 시대 많은 아버지들처럼 아버지도 자식에 대한 애정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는 분이 아니었다.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와 주머니 주머니마다 뒤져 마루에 쏟아놓은 개암열매나 큰 상을 받았을 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학교를 찾아와 반 아이들에게 돌리던 과자박스에 아버지의 말없는 사랑이 담겼다.  

아버지와 나는 십이 년 동안 지상에 함께 머물렀다. 육십 년이 넘는 아버지의 삶 속에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번민이 있었는지 나는 감히 가늠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 못할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할아버지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모든 것이 사람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던 농촌이었다. 나중엔 치매와 중풍에 걸린 노모를 모셔야 했다. 아버지가 짊어지고 있던 삶의 무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을 것이다.


골짜기는 고요하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밭이 된 다랑이 논을 길게 비추고 있다. 손수레에서 삽과 곡괭이를 내리고 청보리와 호밀 씨앗도 챙긴다. 가끔 마을로 밥 먹으러 내려오는 산고양이가 제 털빛처럼 검은 피복비닐 위에 누워있다 고개를 든다. 머위를 옮겨 심은 곳에 고라니 발자국이 찍혀있고 도랑에 멧돼지 똥이 보이는 걸 보니 어제 밤에도 손님들이 많이 다녀가셨다.

무엇을 심을까, 선택은 쉽지 않았다. 밀려 내려온 산 흙과 섞였지만 여전히 논흙이 많아 비만 오면 여기저기 푹푹 빠졌다. 고민 끝에 서늘한 기운이 있는 맨 윗 단에는 추위에 강한 토종다래를 심고 두 번째 단에는 논에서도 잘 자라는 오가피를 심고 두 개의 두렁에는 무너지지 않게 뿌리가 강한 구기자를 심었다. 세 번째 단 위쪽으로 매실나무와 산수유를 심으며 몇 년 뒤 매화꽃과 산수유 꽃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렸다. 물이 잘 빠지고 진흙이 적은 단 아래에는 고추와 호박, 단호박을 심었다. 수확량보다도 땅을 위로하고 싶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이 거쳐 간 곳이었다. 그 옛날 이 구석진 산골짜기에 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돌아가신 지 삼십 년 만에 아버지를 현실로 다시 끌어올린 건 이복오빠였다. 이복오빠에게 아버지가 농사짓던 땅은 ‘돈’일 뿐이었다. 고향도 아니고 논바닥에서 삽질 한 번 해본 적 없으니 애정이 있을 리 없었고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자매들은 달랐다. 탯줄을 묻은 고향이었고 부모님들과 함께 일하던 곳이었다. 빗속에 밤길을 걸어 물길을 보러 다녔고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에서 물싸움 드잡이 하는 것도 보았다. 가벼이 취급될 땅이 아니었다. 결국 이복 오빠의 지분을 우리가 매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기나긴 송사로 우리는 지치고 상처는 상처대로 받았다. 아버지도 원망스럽고 땅도 싫었다. 검게 드러난 논흙을 보면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돌을 고르고 나무와 작물을 심고 가꾸면서 마음이 눅어졌다. 나는 농부였다. 척박한 땅에서도 푸르게 살아나는 다래와 오가피, 고추와 호박을 보면서 굳었던 마음이 풀렸다. 아버지가 가여워졌다. 전쟁과 가난의 험난한 시대를 거쳐 간 흙물 든 낡은 작업복의 아버지를 다시 돌아보았다. 늙고 야왼 아버지가 누워 여름 내내 무성한 초록을 키워내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가을이 되어 호박을 수확했다. 사람도 먹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도 먹는다. 단호박을 따서 친척들에게 돌렸다. 고추를 빻아 꽤 많은 고춧가루를 얻었다. 긴 장마로 개울 둑 두 군데가 무너졌지만 괜찮다. 아버지가 했듯이 나무와 돌로 메꿔 손볼 수 있는 정도다. 

다래와 오가피나무 고랑에 곡괭이로 골을 내고 청보리 씨앗을 뿌린다. 습해에 자라지 못한 매실나무 사이에는 호밀을 뿌린다. 녹비작물의 싹이 잘 나와 지력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길 빌어본다. 여름 내내 짙푸르렀던 나뭇잎들이 붉은 불덩이가 되어 한 해를 정리하고 있다. 산의 계절은 빨라서 곧 낙엽이 질 것이다. 겨울 동안 계곡은 쉴 것이다.  

내년 봄, 노란 개나리와 하얀 조팝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면 반달은 올해보다 향기롭고 어여뻐질 것이다. 아버지가 달이 되어 계곡에 둥실 떠오를 것이다. 


이전 04화 달(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