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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유 Aug 02. 2023

늙은 농부가 있었다. 


아흔이 넘은 그의 온 생은 산과 들에서 보낸 세월. 팔십대에도 굽은 허리 뒷짐에 삽을 들고 물길을 보러 다녔다. 집 앞 밭을 일구고 고추와 콩을 심고 순을 따고 대를 세우며 살뜰히 가꾸었다. 치매에 걸린, 머리 하얗게 센 아내를 경운기 뒤 칸에 태우고 산골짜기 논으로 갔다. 달달거리는 경운기 소리는 마을길을 천천히 돌아 앞산을 울리고 뒷산을 울리며 산길을 올랐다. 길턱에 늙은 아내를 앉혀놓고 거북의 등딱지 같은 굽은 손으로 고라니 망을 세우고 무너진 논두렁을 손봤다. 


아들들의 도움으로 가을 수확이 끝나면 허리춤에 낡은 카세트를 묶고 논에서 이삭을 주웠다. 그 때도 그의 아내는 논둑에 앉아 있었다. 흰 머리칼 바람에 팔락이던 그녀는 다리 뻗고 앉아 삘기를 뜯고 쑥을 뜯으며 늙은 남편을 구경했다. 느리고 청승맞은, 철 지난 유행가가 고요한 산골마을에 퍼졌다.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풍경이었다. 그의 아랫세대는 더 이상 허리를 굽혀 손으로 이삭을 줍지 않았다. 논바닥엔 기계의 바퀴자국이 깊고 선명했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마을의 마지막 농부였다. 곡절 많은 시절 지나 가난을 벗은 뒤에도 아랫세대 영농 법인이니 새로 나온 농업 대출 쫓아다닐 때에도 묵묵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물을 심고 거두었다. 사람들은 시대에 뒤졌다고 그에 대해 뒷말을 했지만 나는 그의 고집이 좋았다. 알아온 세월이 긴 만큼 이런저런 감정이 층층이었지만 땅을 대하는 그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높이 여겼다.


외떨어진 마을회관 벽엔 오래 전 개소식 사진이 걸려 있다. 치매 예방을 위해 화투를 치고 바람병 들까 한 줄로 서서 공놀이 하는 할매들을 고요히 내려다보는 이들. 늙은 농부와 같은 시간을 보낸 이들. 이제는 없는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과 함께 서있다.  


사진의 맨 끄트머리, 내복이 보이는 허리춤에 흩어진 더벅머리 까치집처럼 일어서있는 이. 막걸리를 좋아했다. 초대하지 않은 먼 동네 찬짓집 가서 파전, 굴전, 버섯전 넉살좋게 푸짐히 얻어먹고 흐벅지게 몸싸움 한판 하고 혼잣말 비틀대며 산길을 내려왔다. 검은 얼굴 흙 몸인 듯 논둑 밭둑에서 이빨 없는 입을 벌려 말뚝이처럼 웃었다. 손에서 담배를 떼어놓지 않아 담배 냄새 많던 그이는 마을 꽃놀이 갔다 돌아오던 관광버스 안, 앗싸- 앗싸- 춤추고 노래하는 이웃들 속에서 조용히 세상을 떴다.


뒤란 앵두나무 우거진 집에 살던 이도 있다. 키 작고 오종종한 얼굴에 팔자걸음 유난하던, 시샘 많아 이 사람 저 사람 싸움도 잦았지만 살림은 알뜰했다. 장날이면 콩짐 팥짐 지고 달랑달랑 앞산 고개를 넘고 노란 장화 신고 경운기 몰며 알토란같이 농사를 지었다. 송아지 두어 마리 팔아 들여놓은 이앙기 잦은 고장에 한 계절 무던히 속을 썩었다. 들깻잎 냄새 자욱한 여름 저녁 산 아랫길 둥실둥실 떠오던 그이의 지게 풀짐. 


칠남매가 차려준 칠순잔치 하던 날, 버석이는 한복 바지 흰 대님 어느 새 풀어버리고 지게 지고 개울 건너 콩밭 오르던 먼 친척 아저씨도 거기 있다. 새벽 오이 따고 점심 장작 패고 저녁 논에서 피를 뽑았다. 

울 아부지 불쌍해, 울 아부지 불쌍해, 평생 일만 하고오-. 

막내는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울었다. 새로 맞춘 분홍빛 고운 한복 입은 그의 아버지가 돌담 옆에 서서 보고 있었다. 귀 멀고 말 어눌해 전쟁 때는 여러 번 죽을 뻔도 했다는데 어린 색시가 부르면 어떻게든 알아듣고 논에서 밭에서 뛰어나왔다고 했다. 산에서는 벚나무가 되고 밤나무가 되고 감나무가 되고 들에서는 벼꽃이 되고 가지가 되고 고추가 되고 지상에서 일손 놓은 일주일, 누워서도 앞산뒷산 올랐을 이.


멀지 않은 지난 날, 그들이 이 땅의 등뼈였다. 


떠난 농부를 다시 만났다. 

예초기를 메고 매년 벌초를 해주던 그의 조상 묘 앞, 일천 도의 화장로를 건너와 소복소복 놓여있는 하얀 뼛가루. 관목에 던져진 흰 장갑이 구겨진 새처럼 희뜩였다. 겨울바람 빈 들판에서 짐승처럼 울고 가늘게 치솟은 신갈나무들 타악- 타악- 허공에서 서로의 머리를 부딪쳤다. 

한 세대가 저무는데 노을이 핏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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