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가니, 합리화를 시작했다.

영어는 혼비중천, 수능은 오비토주

by 오도

수학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죽을 싸왔기에 10분 만에 먹고, 제일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양치를 하러 갔다. 양치를 하지 말고 영단어를 더 볼까 싶었지만, 이미 화장실에 들어온 뒤였고 상쾌하게 잠도 깰 겸 양치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양치를 하고 자리에서 쉬고 있는데, 슬슬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의 목은 c자로 되어있는데, 나는 반대 방향으로 휘어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오래 숙이면-가령 자필로 쓰는 수행평가라던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집중해야 하는 모의고사 때는 항상 머리가 아팠었다.-머리가 아파오곤 했는데, 어김없이 그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학교가 끝나고 아팠기에, 집에 가서 약을 먹고 자면 괜찮아져서 수능날도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약을 챙기지 않았었는데...


하필 영어 듣기 평가를 앞두고 머리가 아프다니...!


나는 목 스트레칭을 하다, 점점 심해지는 두통을 느끼곤 보건실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시험장만 우리 학교였지, 시험장으로 쓰는 학교는, 내가 알던 평소의 학교가 아니었다. 어디서 약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일단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들이 계신 걸 알고 있었고, 계속 계신 줄 알았는데, 점심시간이 끝나고 영어 준비종이 울릴 때까지 교무실 문은 굳건히 닫혀있었다.


영어 준비종이 울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아파서 약을 받으려고 했는데, 교무실 문이 잠겨있어서 받을 수가 없었다고. 혹시 보건실 위치가 어디로 바뀌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친구도 모른다고 했다. 그 대신, 머리가 아픈 거면 자기가 혹시 몰라서 가져온 두통약이 있는데, 이거라도 먹을 거냐고 물었다.


오, 정말 하늘이 날 구원해 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약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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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듣기 평가가 시작되었고, 머리가 점점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약효가 아직 발현되지 않은 거라 생각하고, 나는 일단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 두통은 점점 심해졌고, 원래라면 영어 듣기를 하며 뒷장에 있는 문제 4~5문제를 풀어야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 2문제밖에 풀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긴 일렀다.


나는 서둘러 문제를 빠르게 넘겼지만, 내가 읽고 있으면서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순히 영어를 그냥 발음대로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내 평소 실력이 절대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단념할 수 있었고, 내가 2등급을 만들었던 것이 다 꿈이었던 건 아닐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영어가 끝났고, 절망도 잠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사를 수능 한 달 전부터 공부했었는데, 수능 한국사가 상식 선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모의고사 한국사 수준이 너무 올라서 수능 때도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에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지레 겁먹고 그냥 여유롭게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수능은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수능처럼 정말 상식선에서 나왔다. 모의고사와 수능 한국사의 수준 간극은 정말 컸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이 있게 문제를 보면 답이 바로바로 보였다. 나는 5지선다의 모든 문항을 다 확인해서 틀린 지, 맞는지 전부 확인하느라 모든 과목이 시간이 부족했었는데, 정말 정답이 딱 보이는 탓에 바로바로 omr에 체크할 수준이었다. 그렇게 문제를 풀자 10분도 안 걸려서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다. omr을 4번 정도 다시 확인하고 잠깐 단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이제 드디어 시험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수능도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사회문화를 풀었다. 뭔가 체감상 도표문제가 역대 수능보다 많은 기분이 들었지만, 빨리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빨리 문제를 읽어갔다. 그러나 문제 길이가 정말 역대급으로 길게 느껴졌고-실제로도 수능이 끝나고 역대 수능 보다 지문이 훨씬 길었다는 기사가 나왔다.-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감독관님이

"손 내리세요."라 말하실 때, 시험이 끝난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한 페이지가 끝날 때마다 마킹을 한 덕에, 마킹을 못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종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멘탈이 나간채로, 제2 탐구 시간이 시작됐다. 나는 정치와 법을 선택했고, 정말 자신이 있었다. 수능 전까지 1등급을 유지했었던 것도 있고, 아침에 풀었던 작년 수능도 1등급이 문제없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상태로 문제를 풀어나갔고,


또다시, 종이 울렸다.


그렇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수능도 종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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