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가니,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계속 흘러간다.
수능을 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내 세상만 멈췄을 뿐, 다른 사람의 세상들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계속해서 성적을 확인했지만, 확인하면 할수록 오히려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성적 통지표를 받은 하루를 제외하고 다시는 울지도 않았다.
망쳤어도,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결과고, 내가 본 시험인데. 그런 생각을 계속하자, 가채점과 차이가 났던 사실도 투정 정도로 넘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학교에서 하는 수능 후 프로그램을 참여하자,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수능이 끝난 고3에겐 아무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고, 매일이 놀고, 자고, 먹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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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학교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는
수능 원서..!
수시를 붙은 아이들을 보며 수능을 준비하던 것이 불과 몇 주 전 일이었는데, 이젠 최저를 맞춘 아이들의 소식까지 들려왔기에 불안해졌다.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 준비했던 수능이었는데, 학교의 대부분 아이들처럼 내가 낮은 곳을 썼다면, 아니 하다못해 OO대를 마지막 한 장으로 썼다면, 나는 지금 행복하게 웃고 놀고 떠들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합리화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수능을 준비하던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탓에, 다행히 내가 선생님의 상담시간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수시보다 낮은 대학을 써야 붙을 가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내 합리화는 더 심해졌다.
수시보다 낮은 대학을 쓸 바에, 원래 목표하던 곳을 넣고 떨어지면, 오히려 재수할 명목이 더 생기는 거 아닐까? 붙지 않는 게 내게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나는 재수를 해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다른 친구들의 대학 생활을 보며, 가만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수능날에 멈춰있던 내 세상의 시계를 억지로 돌리기 시작했다.
일단, 어디든 붙자. 악으로 깡으로 버텨서 그 학교에서 네 가치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나는 합리화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친척 중 선생님이 있었기에 나는 컨설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컨설팅과 담임 선생님, 과외 선생님의 상담을 반복하며 나는 최종적으로 가군, 나군, 다군의 학교 선택을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수능도 내겐 일종의 도박이었다. 하향인 다군 대학교는 붙을 가능성이 컸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희망하던 가군의 ㅇㅇ대학교, 인서울 중상위권 대학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인서울에 속하는 나군 대학교. 나는 가군과 나군 중 어느 한 곳이라도 붙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은 추가합격을 노리라는 것들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짜증이 늘어갔고, 졸업식 날이 밝았다.
졸업식 팸플릿에 수많은 대학합격 결과들이 보였지만, 나를 받아줄 곳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암울했다. 팸플릿 수상자 목록에 4번이나 적혀있던 나였지만, 상을 많이 받으면 뭐 하나 싶었다. 수상자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면서도, 대학도 붙지 못한 내가 이 상을 받아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만 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또 결과 확인을 하고, 낙담을 하고, 드디어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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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어김없이 좋지 못한 기분에, 잠을 2시까지 자고 있었다. 그때 부모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확인했어?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이미 짜증이 나 있던 나는 저녁 6시라며 성질을 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다시 잠을 자려할 때, 알림 확인만 하고 다시 자자 싶었다. 그런데 문자에, 추가합격 대상자 등록금을 오후 4시까지 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나군 대학교 사이트에 들어가 내 이름과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그 결과는...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이 한마디에 내 기분은 심연 깊숙이에서 하늘까지 올라갔고, 다시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나 합격했어. 나 나군 대학교 합격했어!"
"진짜? 너무너무 축하해!"
그렇게 억지로 돌렸던 시곗바늘을 멈추자, 시계는 다시 째깍째깍 오늘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짜증 냈던 것이 생각났고, 일정을 확인해 보니 오후 6시는 내일 다군 대학교의 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내 합격을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자,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또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학원을 관두고 과외를 하지 않았더라면, 수능에 발을 담글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니, 수능을 보게 된 원인 중에 부모님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내 짜증의 지분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비록 난 대학을 합격했지만, 마음만은 탈락자였다.
곧이어, 나는 등록금이 납부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