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의 이유와 행동의 시작
꿈을 품고 뭔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행복배틀을 해온지 5년 정도 됬을까? 공허함이 가득해졌다. ‘어떻게 지내야 이런 감정이 사라지는 것인가’ 답을 찾아 헤맸다. 나름대로 풍요롭게 사는 것 같아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계속해서 공허함이 찾아왔다. 앞장에서도 말해왔듯이 무언가 도전하고 배울 때는 공허함이 물러가고 뿌듯함이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슬금슬금 내게 다시 허무함으로 밀려왔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싶었다. 한참 코로나 블루로 모든 사람들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대면 강의가 대부분인데 코로나로 인해 대면 강의에서 온라인강의로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였다. 자연스레 일도 줄게 되었다. ‘내가 과연 앞으로 미래를 확신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수많은 고민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인생과 진로를 확실하고 뾰족한 방향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강사로 수년간 지내왔지만 어느 분야의 특정 전문가는 아님을 인지했다. 고민해보니 나는 내 분야의 전문적인 강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0대 초반에 꿈꿔왔던 미용 전문 강사로 가야겠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나는 미용 쪽의 관련 다수 자격증들을 보유했기에 미용 학원에서 근무를 해볼까 싶었다. 육아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일들로 선별해 봤다. 하지만 나의 나이와 시간 그리고 경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여러 군데 뷰티 아카데미 원장님들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내게 맞는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대학원 진학이었다. 누가 나를 채용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20대때 육아를 하면서 연년생 쪼꼬미들을 케어하며 대학원에 진학할까 고민도 했고 교수님과 상담도 했다. 그 당시는 너무 어렸던 아이들을 놔두고 다니기엔 무리수를 두는 것 같아 금방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초등학생들이니 내가 대학원에 다녀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나는 32살 봄,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꽤나 진지한 꿈을 가지고 대학원을 갔다. 코로나가 아직 다 끝난 시기가 아니라 몇 주는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이대로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된다면 학교 다니기 너무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셋 째 주부터는 정상적인 학교 등교가 시작되었다. 대학원은 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되어서 나는 나머지 시간에는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로 수입을 얻었다. 사실 나는 어렸을 적 뭐하나 뛰어난 구석은 없었지만 이래 저래 성실하긴 했기에 자격증도 많이 따 놓기도 하여 월요일엔 드론과학, 화요일엔 실험과학, 목요일엔 독서논술, 금요일엔 컴퓨터 수업으로 대학원을 가는날 빼곤 전부 다른 과목의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어떻게 여러 가지 수업을 할 수 있냐고 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막상 해보니까 모든 과목의 연관성이 있었다. 수업하는 학교가 전부 달랐기 때문에 달마다 서류를 내야 하는 것이 조금 벅차긴 했지만 나름대로 수업은 잘 해냈다. 나에게 어떤 과목이 주어져도 잘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대학원에 진학하니 어리고 예쁘고 똑똑하고 능력있는 친구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매주 자극을 받으며 지금 내 분야에서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결국 대학원 다닌 지 두 달 만에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 무 대포 정신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나는 공허함의 이유를 찾아가며 나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고 있다. 공허함이 찾아왔다는 것은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려고 찾아오는 것이구나’, ‘무언가 도전해야 하는 시기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