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 거리로 가입시더.”
"거기가 어디예요?"
택시 기사 아저씨가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연세대 지나서 쪼매만 더 가면 모래내시장 안 인능교. 그 근방 인데.....시장 앞 삼거리 지나서 좌회전하시면 됩니더.”
그때 처음 알았다. 새로 이사 간 우리 동네 이름이 땡땡 거리인지.
엄마 아빠가 서울에 올라와서 이사를 여러 번 한 끝에 드디어 집 장만을 한 것이다. 그동안 아이 넷을 데리고 사글세 집을 전전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 집을 마련한다는 건 웬만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이 좁아 네 명이 옹기종기 한 방에 자고, 이사 다닐 때마다 장롱 문짝이 부서지고, 이불이 터지고, 쌀독이 비워지는 그런 날들이 몇 해를 이어졌다.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엄마 아빠는 집을 장만했다.
대문 앞에서 아빠는 문패를 달았다. 햇살이 기와지붕 위에 쏟아지던 날이었다. 가족들을 전부 대문 앞에 모아놓고 문패를 다시면서 짓던 아빠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마도 몇 만 년 전 고생고생하다 얼룩말을 잡아 온 원시인도 저 표정이지 싶었다.
땡땡거리. 동네 어귀로 경의선 기차가 지나가고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에 차단기와 건널목이 있어 땡땡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건널목이 하나 있고 조금 걸어 내려오면 조금 더 큰 건널목이 있는 경의선 기차 노선이 세 개나 지나는 구조였다. 신호등이 번쩍이고 차단기가 내려오면 모두가 잠시 멈춘다. 이름 모를 기차가 철커덩, 철커덩 소리를 내며 동네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땡땡땡땡 소리에 일상이 끊겼다.
건널목을 지나면 나름 동네 길 치고는 큰 대로가 있고 길 양편으로 다양한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주택상회, 육일 방앗간, 정육점, 삼화 철물점, 국숫집, 종로 미용실, 쌀가게, 연탄 집, 첨단 양장점, 한일 금은방, 복덕방, 문방구, 서호 목욕탕, 대영약국까지. 사람들 생활에 필요한 온갖 잡화점이 다 있었다. 없는 게 없었다. 간판들은 누렇게 바랬고, 아이들의 손때 묻은 출입문은 삐걱거리며 열렸다. 동네 어르신들은 가게 주인들과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고, 방앗간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개 짖는 소리가 섞이던 그런 거리였다.
우리 집은 윗동네 쪽, 경사가 살짝 진 국민주택단지 안에 있었다. 방 세 칸, 마루, 입식 부엌, 목욕탕, 마당이 딸린 아담한 집. 그 마당이야말로 내가 제일 사랑한 장소였다. 라일락, 목련, 후박나무, 앵두나무, 회양목, 이름도 모르는 작은 꽃나무들. 봄이면 온 동네가 연보라와 연두색으로 물들었고, 꽃잎들이 날리면 마당은 어느새 꽃그늘이 되었다.
내가 그 집을 좋아했던 이유는 마당이 넓었고 마당 안에 그네가 있었다. 아빠가 어디선가 구해다 놓은 그네였다. 마주 앉아 탈 수 있는 양방향 그네. 요즘 놀이터에선 보기 힘든 그네였다. 그네를 타며 언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는 책을 읽으러 그네에 앉아 있곤 했다. 나는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리 언니는 책 읽을 때가 제일 낫다.
우리 집은 당시로선 꽤 신식이었다.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고, 부엌에 곤로가 아니고 프로판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방 하나는 공부해야 한다고 오빠 혼자 썼고 마당이 보이는 방 하나는 언니와 내가, 안방은 엄마 아빠와 어린 남동생이 사용을 했다. 언니와 오빠를 낳고 엄마가 계속 유산을 하는 바람에 언니와 나는 터울이 많이 진다. 그래도 언니랑 한 방을 썼다. 작은 집이었지만 우리 여섯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히 넓었다.
저녁이면 엄마가 된장국을 끓이고, 오빠가 시험공부를 하는 틈에 언니는 마당에서 빨래를 걷고, 나는 마루에 앉아 안마당을 내다보곤 했다. 그때마다 늘 생각했다. 이건 우리 집이다. 누가 내쫓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우리 집’.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김귀주 할머니. 그 동네의 추억을 떠올릴 때 그 동네 사람도 아닌 할머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봄이 시작되면 늘 서울에 올라오시기 때문에 동네의 첫인상이 할머니와 겹쳐져서 그런가 보다. 할머니가 오시면 개나리도 피고, 바람도 달라졌다.
옥색 한복, 은비녀, 작달막하지만 당당한 체구. 아빠와 함께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가면,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금세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만큼 품위와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 없었다. 꼿꼿한 걸음걸이, 그렇지만 다소곳한 몸가짐. 안동 양반댁 출신이라는 게 그 품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딸만 내리 셋을 낳고 시댁에서 눈치만 보며 살았다고 하셨다. 하루는 외국인 신부님이 집에 오셨단다. “천주님을 믿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 그 말만 믿고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정말 주님의 은총인지 그동안 먹은 한약 덕분인지 그 이후로 아들 다섯을 내리 낳으셨다. 우리 집안 친척 중에 할머니 식솔들만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늘그막에 다섯 아들 집에 놀러 다니시는 것이 큰 낙이었다. 셋째인 우리 아버지만 서울에 살았다. 해마다 봄이 되면 개나리 꽃소식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오셨다. 할머니가 오시면 우리 엄마는 바빠진다. 일단 창문 창호지 다시 바르고 이불빨래 다 하시고 온 집안 대청소를 하신다. 그에 못지않게 나도 바빠진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할머니 세수 시중들어 드리고 아침에 성당 가시는 길 안내를 해야 한다. 왜 그런 힘든 일을 자청했느냐 하면 그야말로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우리 할머니는 이가 하나도 없으시다. 위아래 틀니를 끼셔서 음식을 드실 때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소리의 출처가 너무 괴이하다 싶었는데 아침에 양치하실 때 틀니를 빼신다. 분홍색 잇몸에 달려 나오는 이빨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다. 세수 마치시면 긴 머리를 빗으시고 쪽을 새로 지신다. 나는 거울을 알맞게 들고 앉아있다. 떨어진 머리카락은 모두 주어서 예쁜 귀주머니에 보관하셨다. 이상하게 머리카락을 버리지 않고 모아놓으셨다.
오후에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놀지 말고 빨리 돌아와야 한다. 오자마자 책을 읽어 드린다. 그 똑똑하신 분이 한글을 못 읽으신다. 그래도 집안 남자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항상 책을 가까이하셨다. 내가 주로 읽은 것은 마루 책꽂이에 있던 세계 문학 전집이다. 문제는 한자는 없지만 세로 조판이라 읽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교과서는 가로 조판이었으니 말이다. 데카메론, 부활, 전쟁과 평화,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죄와 벌, 여자의 일생 등등. 아홉 살인 내가 할머니와 같이 읽었던 책들의 목록이다.
내가 책을 보면서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왜 이렇게 인간들은 문제를 만들면서 살고 걱정을 사서 하는지, 그 어느 책도 주인공이 편안한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막 지어내서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아시는 것도 같고 모르시는 것도 같았다. 어떤 때는 빨리 나가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주인공을 죽였다.
“그 사람 어제 죽었는데....” 할머니가 갸우뚱하셨다.
내가 창의력은 높은데 기억력이 안 좋아서 생긴 상황이었다.
할머니가 서울에 오시면 서울에 있는 친척들이 전부 인사를 드리러 온다. 그때 맛있는 과자, 사탕, 캐러멜, 양과자 등등을 사 오셨다. 항상 진지 드시고 한약을 드셨는데 그때 입가심으로 단 것을 드셨다. 친척들이 사 온 모든 주전부리는 남동생도 안 주시고 상자에 꼭꼭 숨겨놓으신다.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할 수 없이 하나를 주신다.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구인가. 입안의 혀 같은 할머니의 비서 아닌가. 아침 세수 시중들지, 성당 가시면 길 안내 하지, 이야기책 읽어 드리지, 내가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바로 남동생을 보게 되어서 할머니가 나름 귀여워해 주셨다.
금요일은 책 안 읽으시고 화투를 치신다. 당연히 화투도 나하고 치신다. 동생은 어리고 며느리와 칠 수는 없지 않은가. 요즘 엄마들이 보면 질색할 일이지만 난 할머니에게 직접 화투를 배웠다. 일종의 조기교육이면서 융합교육이었다. 화투장의 가로세로 비율과 손에 만져지던 그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사십 팔짱의 족보를 알고, 짝을 찾고, 내 수 체계는 지금도 12진법이다.
“일 년은 열두 달, 12월은 비, 손님을 뜻하고 인생의 마지막은 손님처럼 왔다가는 기라. ”
우리 할머니는 화투도 철학을 갖고 치신 것 같다.
일솔, 이매조, 삼사쿠라, 오난초, 구국중.... 처음에는 배우는 입장이었는데 점점 나의 화투 실력이 좋아졌다. 내가 타짜가 된 것은 아니고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재주가 생겼다. 우리 할머니는 비와 삼 광을 좋아하셔서 절대 마지막까지 내놓지를 않으신다. 어느 정도 뽑기 할 금액이 되면 좋아하는 비 내드리면 된다. 어서 드시고 이기시라고. 아홉 살에 화투를 치면서 처세의 중요한 원리를 터득하는 중이었다. 하얀색 1원짜리, 금색 5원짜리 동전을 판돈으로 걸고 화투를 쳤다.
얼추 이 십원 정도 모이면 들고 동네 공터로 달려갔다. 어휴, 아직 뽑기 장사가 있었다. 5원짜리 큰 달고나 우선 만들어 먹고 그다음은 침 발라가며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내면 된다. 별 모양, 비행기 모양. 연보라 라일락 꽃그늘 아래에서 나의 봄날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