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가운데 큰길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여러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길은 지금 생각하면 참 짧았는데, 어린 시절의 눈에는 서울 시내 못지않게 넓고 북적이는 중심지였다.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잡화점이 있었고, 파마 약 냄새가 흘러나오던 미용실이 있었으며, 거리 끝에는 소독약 냄새가 은근히 풍기는 약국과 훈훈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목욕탕이 있었다. 이곳은 우리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생활의 무대였다.
그중에서도 초입의 주택상회는 단연코 중심이었다. 대진이 엄마 아빠가 운영했는데, 없는 게 없었다. 두부, 콩나물, 간장, 설탕 같은 생필품은 기본이고, 아이들을 유혹하는 달콤한 과자와 아이스크림까지 다 있었다. 보름달 빵을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잼이 입 안에 퍼지고, 누가바는 혀가 녹을 정도로 달았다. 여름이면 칠성사이다가 얼음물에 담겨 있었는데, 병마개를 따는 순간 "칙―" 소리와 함께 탄산 기포가 톡톡 터졌다. 지금의 편의점과 마트를 합쳐놓은 곳이 바로 주택상회였다.
아줌마들은 저녁 장을 보러 지나가는 길에 두부 한 모, 계란 한 줄, 혹은 멸치를 사갔고, 아저씨들은 퇴근길에 담배와 소주를 챙겼다. 심부름은 늘 아이들의 몫이었다.
“선아, 꽁치 간소매 하나 사 오너라.”
“선아, 계란 한 줄 사 오너라.”
나는 거의 매일 엄마 심부름으로 상회를 들락거렸다. 곱셈은 영 젬병이었지만 덧셈 뺄셈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거스름돈 계산을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계산을 마치면 대진이네 아저씨가 꼭 물어보셨다.
“아저씨가 얼마 줘야 하지?”
“음.... 280원이요.”
“고것 참. 어린것이 어쩜 이리 셈을 잘하는지...”
공부 못하는 내가 여기서 만큼은 똑똑이 대접을 받고 있었다.
주택상회는 동네 초입에 있다 보니 가계 앞쪽에 큰 평상이 있었고 늘 동네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담배를 꼬나물고 동네 소식을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동네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금세 눈치챘고, 어느 집에 사돈의 팔촌이 왔는지도 다 알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주택상회의 기능은 따로 있었다.
지역 은행 역할을 한 것이었다. 물론 큰돈은 아니지만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주택상회로 가서 돈을 빌렸다. 지방에 내려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을 때, 가족 중에 누가 아플 때,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돈이 모자를 때, 은행은 저 멀리 시내에 있었다. 보증은 그 사람 얼굴이었다. 우리 집도 동생이 크게 다쳤을 때 신세를 졌다.
우리 집은 계단을 몇 개 올라가야 대문이 있었다. 엄마가 계단마다 예쁜 화분을 놓아서 멀리서도 우리 집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루는 남동생이 세발자전거와 함께 거기서 굴러 떨어졌다. 이마에서 새빨간 피가 막 나고 동생은 울고불고.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놀라서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엄마가 동생을 둘러업고 모래내 시장 삼거리에 있는 대도의원으로 가셨다. 그러면서 나를 붙잡고 급하게 말씀하셨다.
“너 지금 주택상회로 뛰어가서 아저씨한테 대도의원으로 만원만 가져오시라고 말씀드려. 나중에 드린다고 말하고.”
달리기는 못하지만 열심히 뛰었다. 가게에 도착해 보니 아저씨가 없었다. 낮에 안채에서 잠깐 주무시고 계셨다. 안으로 가서 숨이 차서 말도 안 나왔지만 더듬더듬 말했다. 아저씨는 아줌마한테 가게를 맡기고 병원으로 가서 엄마를 도와주셨다. 동생은 무사히 머리를 꿰매고 입원을 했다. 며칠 뒤 엄마 아빠가 가게로 찾아가 아저씨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아저씨가 나에게 고급 과자인 사브레를 한 상자 주셨다.
땡땡거리에 살았던 사람 중에 대진이네 아저씨에게 신세 안진 사람이 있을까. 돈을 벌어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조용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식빵의 건포도처럼 콕콕 박혀있다.
내가 학교 끝나고 자주 갔던 또 다른 곳이 대영약국이다. 조신하고 참하게 생긴 박영란 약사님이 운영하는 약국이었다. 연한 소독약 냄새와 반짝이는 유리 진열장이 늘 깨끗하게 유지되었고, 약사님이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았다. 약국에 들어서면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마음까지 진정시켰다. 약사님은 내가 귀엽다며 원기소 세 알이나 비타민 C를 손에 꼭 쥐여주곤 했다. 오물오물 씹어 먹으며 나는 약국 긴 장의자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곤 했다.
내가 약사 이름을 알게 된 건 왜 대영 약국인지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 박영란에서 ‘영’ 자를 따고 남편 이름에서 ‘대’ 자를 따왔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 뒤로 나는 남자를 볼 때마다 그 사람 이름과 내 이름을 맞춰보는 습관이 생겼다. 김대진 하고는 대민, 전성하 하고는 성민, 이런 식으로....
이곳 대영 약국도 동네 사람들이 항상 들르는 곳인데 단순히 약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작은 동네 병원과 심리 상담소를 겸한 곳이었다. 일단 이곳에 오면 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억울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디가 불편한지, 어쩌면 좋은지 등을 물어본다. 그러면 약사가 조용히 듣고 약을 조제해서 어떻게 먹으라고 설명을 한다.
상희네 아줌마가 들어온다. 시어머니 욕을 한다. 자기가 속이 좋아서 참고 산단다. 며칠 전에도 집에 쥐를 잡다 싸움이 났고 결국 쥐 잡는 약을 사갔다. 민수네 아줌마가 들어온다. 민수네 아저씨가 춤바람이 났는지 여자가 생긴 것 같단다. 아줌마가 울고불고 이대로는 못 산단다. 이 분은 수면제를 두 알 사갔다. 감기 몸살인 사람, 연탄가스 살짝 마신 사람, 모기 물린 사람, 다양하기도 하다. 종류별로 약을 사간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것이 항상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약을 처방해 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용하다고 동네 소문이 났다. 몸이 되었든 마음이 되었든 조금만 아프면 대영 약국으로 갔다. 아무튼 우리 동네 사람 중에 크게 아픈 사람 없이 그 시절을 보낸 것은 다 박영란 약사님 덕분이다.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은 나와 언니를 미용실에 데리고 갔다. 언니는 단발머리, 나는 바가지 머리로 자르고 엄마 본인은 석 달마다 파마를 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머리를 기르고 싶었는데 머리에 이 생긴다고 절대 못 기르게 했다. 까만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 같은 웃긴 머리 형태였다. 나는 단발머리도 하고 파마도 해보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작은 갈비뼈 같은 것에 돌돌 말고서 보자기를 씌워준다. 한 시간쯤 후에 풀면 머리가 라면땅이 되어 있었다. 내 바가지 머리만큼 우스웠지만 한번 해보고 싶었다. 온 동네 아줌마들이 다 그 파마머리를 하고 있어서 약간 신분증 같은 머리였다. 우리 동네 종로 미용실 언니의 작품이었다. 종로 미용실 언니는 손재주가 많았다. 머리를 잘 손질하고, 음식도 잘하고, 싹싹하고, 무엇보다 식물과 꽃을 잘 키웠다.
종로 미용실은 동네 한가운데 있기도 했고 여자들이 항상 모여 있어서 동네 방송국 역할을 했다. 파마 기다리는 동안 한두 시간 기다려야 하는 통에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가 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집이 들었어? 성하 아빠가 기자였다고 하드만”
“어머 그 여편네 과부가 아니었던 거야?”
“작년에 행방불명이 됐다더니만. 퇴근하고 오다 없어졌대.”
“어머 그래? 아이고 세상에. 애들 데리고 힘들겠다.”
“친정엄마랑 오빠랑 와서 울며불며 얘기하는 걸 들었지.”
“아니, 근데 그 여잔 왜 파마를 안 해? “
”긍께. 지가 뭐라고. 김지미도 아닌 것이 생머리를 묵고 다니고 지랄이여. “
종로 미용실 언니도 한마디 한다.
”애들 머리도 자기가 자르는지 미용실도 안 와요. “
”아무튼 재수 없어. 남자 홀리게 생겨 가지고... “
나도 성하가 아빠 이야기만 나오면 얼버무리곤 해서 아빠가 돌아가신 줄 알았다. 질투 섞인 목소리, 연민 어린 한숨, 그리고 은근한 험담이 뒤섞였다. 동네에서 가장 예쁜 성하네 엄마 이야기가 단골 화제였다. 아줌마들은 그녀가 생머리를 하고 다닌다며 재수 없다고 했지만, 어린 내 눈에도 성하 엄마는 참 예뻤다. 냄새도, 말투도 아줌마 같지 않았다, 성하네 아줌마는 모래내 시장 수입품 상가에서 일했다. 엄마랑 도시락 통을 사러 그 가게에 갔는데 거기에 성하네 아줌마가 있었다.
”민선이 도시락 통 사러 왔구나. 우리 공주님한테는 이 색이 어울리는데 어떠니? 마음에 들어? “
하늘색 보온 도시락 통이었다. 음, 역시. 공주 눈에는 공주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것이다. 성하 엄마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은 더 예쁜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 새로운 소식을 알고 싶으면, 뭔가를 자랑하고 싶다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면, 종로 미용실에 가면 되었다. 70년대의 SNS였다.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쓴 아줌마들의 수다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이렇듯 우리 동네는 작은 가게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주택상회는 은행이었고, 대영 약국은 상담소였으며, 종로 미용실은 방송국이었다. 그 길목이야말로 하나의 작은 도시였다.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린 풍경이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