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이야기 2 - 구구단

by 서유정

요즈음은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 집도 많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 감정적 소모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1970년대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한 가정에 세 명, 네 명의 형제자매는 기본이었고, 여섯, 일곱까지도 드물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동네 골목마다 넘쳐났고, 학교는 늘 포화 상태였다. 마치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교실, 부족한 공간에 아이들을 나눠 담기 위해 오전반, 오후반 수업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골목은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유치원도 어린이집도 드물었던 시절, 엄마들이 바쁘면 형과 누나, 언니, 오빠들이 동생들을 데리고 골목으로 나왔다. 골목은 하나의 커다란 운동장이자 놀이터였다.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땅따먹기 선을 긋고, 골목 구석의 맨홀 뚜껑을 ‘술래’의 시작점 삼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쳤다. 아이들 목소리는 해질 무렵까지 끊이질 않았고, 한 집 건너 아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놀이가 정리되었다.


나는 엄마의 유별난 교육열 덕분에, 동네 국민학교 대신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역사 깊은 학교에 다녔다. 그 학교는 수영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그 학교는 수영장보다도 ‘너무 멀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전반일 때는 다행히 아빠가 출근길에 데려다주셨지만, 오후반일 때는 혼자였다. 혼자 버스를 타야 했고, 혼자 시간 맞춰 나가야 했고, 친구들과 뛰노는 와중에도 시계를 살펴야 했다. 엄마와의 실랑이는 일상이었고, 지각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다. 집에서 나가기 싫어서, 친구들과 더 놀고 싶어서, 혹은 단순히 ‘가기 싫은’ 마음으로 꾸물거리다가....

결국은 아빠의 단호한 결정으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동네 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내심 못마땅해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학 수속을 밟아주었다. 새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숨이 턱 막혔다. 아이들로 가득 찬 교실. 오전, 오후 반은 없었지만, 대신 별관 공사가 끝나지 않아 거의 두 반이 한 교실에 들어앉아 수업을 받는 상황이었다. 내 번호는 무려 102번. 교실 안에는 이인용 책상에 세 명이 앉아 있는 구조였고, 나는 맨 뒤에 앉은 성하와 대진이라는 남자애들 사이에 껴서 앉게 되었다.


성하와 대진이는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지우개 넘어오면 싸우고, 앉을 때 의자 빼서 또 싸우고, 그야말로 장난꾸러기들이었다. 둘은 거의 매일 벌청소 당번이었다. 그런데 나도 거기 함께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2학년 때 공부를 소홀히 한 덕분에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고, 곱셈이 막히는 바람에 선생님이 시키는 나머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단부터 9단까지를 다 써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이유는 달라도 매일 남는 바람에 금방 친해졌다. 하루는 셋이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성하가 말했다.

" 야, 너 5단까지는 아냐?"

"응, 9단도 알아. 6,7,8단을 잘 몰라." 내가 부끄럽지만 말했다.

" 그럼 쉬워. 8×9는 8 이 10 개 있으면 80이고, 하나 모자라니까 8을 빼면 72이야. 6×8 은 얼마겠어?" 성하가 말했다.

"60에서 얼마나 빼야 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6×2는 12 니까 해봐." 성하가 말했다.

"설마 48?" 내가 놀라면서 말했다.

"잘하네. 너 인제 나한테 오빠라고 해라."

성하가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나처럼 구구단을 반쯤만 아는 아이에겐 기가 막히게 쉬운 방식이었다. 그날 이후로 곱셈이 무섭지 않았다. 수학 문제도 점점 재밌어졌고, 나머지 공부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아이들에게 배우는 방식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쾌하고, 또 즐거웠다.


한 달쯤 지나 별관 공사가 끝나고 드디어 분반이 이루어졌다. 운명처럼 우리 셋은 모두 2반이 되었고,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소문이 자자한 이선원 선생님이었다. 얼굴도 잘 생겼지만 성격도 좋아서, 화도 거의 내지 않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는 겨울 생일이라 또래보다 한 살이 어렸다. 다른 아이들은 열 살인데, 나는 아홉 살. 성인은 한 살 차이가 별거 아니지만 아홉 살과 열 살은 머리 하나만큼의 키 차이가 났다. 그 나이에 한 살 차이는 키도, 생각도, 행동도 꽤 큰 차이가 났다. 내가 다른 여자아이들보다는 남자아이들과 잘 어울렸던 이유는, 나와 사고방식이 비슷해서였던 것 같다.

내 생각은 이랬다.

‘도대체 학교는 왜 매일 가야 하지?’

‘왜 선생님은 매일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하는 걸까?’

‘나가 놀지도 못하게 할 거면서 왜 학교에 오라고 했나?’

‘덧셈을 잘하는데 굳이 곱셈까지 해야 해?’

‘글을 읽고 쓰는데, 더 배울 것이 있을까?’

학교는 나에게 배움의 공간이라기보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곳이었다. 이모가 사준 예쁜 가방과 반짝이는 구두가 없었다면 아마 난 국민학교도 자퇴를 했지 싶다.

3학년이 되자 드디어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엄마는 입이 짧은 나를 위해 큰맘 먹고 수입상가에서 ‘일제 보온 도시락통’을 사주셨다. 밥을 덮은 뚜껑을 열면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밥 냄새가 교실 안에 퍼졌다.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양은 도시락통을 들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내 별명이 ‘보온밥통’이 되었다. 처음엔 좀 창피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야, 보온밥통, 너 오늘 반찬 뭐야?”

“보온밥통, 지우개 좀 빌려줘.”


방과 후에 벌 청소 할 일은 없어졌지만 우리는 성하네 집에 가서 같이 놀았다. 성하네 엄마는 모래내 시장의 수입품 상가에서 일했다. 성하가 돌보아야 할 여동생 둘이 있어서 같이 데리고 놀았다. 대진이는 동네 슈퍼인 주택상회집 아들이라 집에 공부방이 따로 없었다.

일단 집에 가면 주전자에 물을 끓여 성하네 집에 많은 미군 부대 분유를 탔다. 대진이가 가져온 보름달 빵하고 같이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친구와 함께여서 더 맛있었던 기억.

그다음에는 학교 숙제를 했다. 나랑 대진이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지만 성하는 아니었다. 숙제를 먼저 하고 놀자는 거였다. 당시에는 전과라는 참고서가 있어 모든 과목의 내용이 정리되었고 답도 있었다. 우리는 셋 다 그게 없었다. 대진이가 재작년 것을 주워와서 잘 쓰고 있었지만 책이 바뀐 부분이 있어서 어떤 때는 답답했다.

송충이를 잡아오라는 숙제도 있었다. 내가 벌레를 너무 무서워해서 둘만 동네 야산으로 잡으러 갔다. 나는 성하 동생들이랑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공부는 성하가 잘했지만 송충이는 대진이가 잘 잡았다.


남자애들하고 같이 놀 때는 땅따먹기, 술래잡기, 치기 장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을 하고 놀았다. 놀 시간이 없지 놀 거리는 정말 많았다. 우리가 자주 한 놀이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랑 얼음 땡이었다. 오는 대로 인원을 추가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놀이였다. 동생들도 같이 데리고 놀았는데 그 아이들은 맨날 술래를 할 수가 없어서 깍두기라고 정해 놓고 놀았다. 깍두기는 걸려도 봐준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은 유치원생부터 6학년까지 다 같이 놀았다. 편갈라 놀 때는 데덴찌로 편을 나누었다. 데덴찌를 할 때도 잘하는 애들끼리, 못하는 애들끼리 나누어서 했다. 그래서 편은 항상 잘 나누어졌다. 누굴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오래오래 다 같이 재미나게 놀 수 있으니까 그랬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학교는 그저 오전의 의무였고, 진짜 삶은 오후의 놀이에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엄마의 부르는 소리가 골목을 타고 퍼지면, 그제야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명 안 남으면 하루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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