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in나 essay 29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잠시 멈춰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으리라.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 세상이 모두 나를 오해해도, 그 사람만은 내 말에 먼저 귀 기울여주고 내 마음을 먼저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렇게 서로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이와 함께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고 위로라고 믿어 왔다.
누군가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에 금이 가고, 누군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상처 입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시비를 가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사람이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사람. 눈빛으로 "나는 네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 우리는 모두 그런 내 편에게 힘을 얻으며 살아간다.
내 편이 필요한 하루, 내 편이 되어줄 누군가가 간절한 밤.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마음이 답답했다. 마침 내 편에게 전화가 왔다. 내 편에게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다. 특별한 말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 나에게 침묵이 답하던 순간. 차가운 침묵만이 내 마음을 파고들던 그 순간. 견디기 힘들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울먹이는 목소리와 훌쩍이는 소리에도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세상이 다 등을 돌려도 옆을 지켜주는 유일한 내 편이라고 확신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활짝 열렸던 마음의 문이 침묵이 흐를수록 조용히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으니 늦은 감은 있겠지만, 침묵만 지켰던 그 시간을 뒤늦게라도 공감받거나 위로받고 싶었다. 그날 그 순간의 침묵이 계속 이어질수록. 침묵이 일관될수록. 그저 내 기대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점점 확신은 커져갔다. 이제는 예전만큼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예전처럼 마주하며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내용의 이야기든 내 얘길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 태도는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예민한 거라고,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잠을 푹 자라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내가 예민한 건지, 피곤해서 그런 건가 싶어 밤새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도 결국은 원점이었다.
내 편은 내가 웃을 때 같이 웃어 주고 내가 눈물 지을 때, 단지 내가 슬프고 힘들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 보다 나를 먼저 염려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그 순간의 침묵은 내가 하는 말과 내 감정을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표현 같았다. 통화 내용이 달갑지 않아 그만 끊고 싶다는 듯. 그 태도는 '아, 이 사람 내 편이 아니구나!'하고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내 마음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기대 왔던 어깨에 이제는 기댈 수 없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언제든 기대도 된다고 믿었던 유일했던 그 어깨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 순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네가 좀 예민한 것 같아.” 그 말들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랑은 논리를 벗어나고 상식을 벗어나 가끔은 유치한 것 아니던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비를 맞으며 우산을 든 사람 옆에 서 있는 기분이다. 분명 같이 비를 맞고 서 있는데, 전혀 젖지 않은 그 사람. 나란히 서 있는 나는 계속 젖고 있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공격적으로 나를 몰아세우던 사람으로 인해 종일 곱씹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던 나에게 침묵이 답했다. 말로 전달하고 있지만 내가 겪은 속상함은 전해지지 않고, 내 말은 허공에 흩어지고, 침묵이 흐를 때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너무 큰 것을 바랐던 것일까. 그 침묵을 깨며 툭 툭 튀어나온 말들.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 사람 왜 그러지.”, “그랬으면 됐지, 뭘 그래.”, “잠 좀 푹 자.” 마치 오히려 내가 잘못한 거라고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침묵보다 그 말들이 더 속상했는지 모른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중립적인 태도는 외면과 같이 느껴지고, 위로라며 가볍게 던진 말들은 속상한 내 감정을 불필요한 감정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 중립을 지키거나, 내 감정을 가볍게 받아넘길 때, 마음 한 켠은 고요하게 무너진다.
유난히 컴컴하고 속상했던 그날 그 밤은 내 편 없이 결국 혼자서 이겨내야 했다. 혼자서 끙끙 앓는다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그 누구보다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무엇이든 말해 주면 좋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실망스러웠다. 내 편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며 나 혼자 모래성을 쌓아온 것 같은 허무함이 느껴졌다.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고 엄청난 이유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큰 일 때문이 아니다. 행복이 그러하듯 고통과 슬픔은 주관적이어서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똑같은 고통과 슬픔이 될 수 없다. 내 말을 들어보니 별것 아니라며 가볍게 넘기고, 침묵을 일관하며 외면당하던 그 순간이 오히려 답답하고 힘들게 했던 그 일보다 더 아프게 상처로 남아버렸다.
말뿐인 응원도 힘이 된다는 건 실제 뇌과학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눈앞의 모니터 화면에 명령어를 띄우고, '쥐세요'라는 표시가 나오면 손잡이를 살짝 쥐게 하는 거다. 그러다 '쥐세요' 신호가 나오기 전에 '힘내' '잘한다' 같은 응원이 되는 긍정적 단어를 보여주고 '쥐세요' 표시를 보내면 손잡이를 쥐는 힘이 2배로 강해졌다고 한다. 이는 말뿐인 글자뿐인 응원도 진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다. 자신이 응원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도 글자를 본 것만으로도 확실히 의욕이 생긴다는 것을 증명해 준 실험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조금 낯간지럽고, 뜬금없더라도 그 한 마디 건넬 수 있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 그 마음이 전부 전달되지 못해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다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내 편이라고 믿는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말 한마디, 메시지로 보낸 단어 하나에 응원을 받고, 하루를 이겨낼 힘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크게 어렵지 않은 그 일을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하루를 보내며 두 번 세 번 아니 백번이라도 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해되지 않고 잘 모르겠더라도, 그저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이유만으로도 우선 공감하고 위로하며 응원해 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순간만큼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랐던 건 사치였을까. 내가 필요로 하는 순간 곁에 머물러 주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하고 싶을 때 함께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진짜 내 편이리라. 그런 마음과 노력으로 관계를 이어가려는 의지를 품은 사람과 관계는 유지되기 마련이다. 여전히 침묵은 이어지고 있다. 점점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는데 차라리 잘됐다고 여기는 걸까. 이전과 달리 시큰둥한 말투와 뜸한 통화, 평소와 달리 줄어든 문자와 안부는 서서히 멀어지는 거리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별다른 말없이 등을 돌린 채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그 순간은 참으로 냉혹했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고 느꼈던 만큼, 아니 어쩌면 배로 더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 뒷모습이었다.
여전히 나는 묻고 있다. “내 편이었는지, 내 사람이 맞는지, 아니면 나의 환상과 착각이 만들어낸 것인지.” 아무리 혼자 묻고 답해 봐야 다시 원점인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