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 각자의 모토가 있다면
남자는 '정복'이고,
여자는 '소유'일 것입니다.
난 당신의 세계 심장부에다 깃발을 꽂고
"사랑해!"를 외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세계를 가지고
"사랑해."를 말해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2.
길 가다가 우연히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 옆에 어떤 한 남자가 있더군요.
심장이 머리로 솟는 경험을 해 보신 적 있습니까.
여유란 태도입니다.
태도는 상황에 좌우되곤 하죠.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도 여유를 탑재하기란
부처가 아니고서야
난 아직 힘듭니다.
또 그늘 속으로 들어가
뒤를 밟습니다.
당신과 그 남자는
어느 한 식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봇대를 곁에 두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곧 비가 올 것만 같습니다.
깃창을 숨깁니다.
3.
질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질 때에
이루고 싶은 것은 못 이룰 때에
우리는 열등을 느끼고 시기와 질투를 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분명히 머리로는 아는데 말이죠.
한데 아십니까.
내가 상대방보다 낫다는,
그런 우월감을 갖고 있을 때엔
간사하게도 안심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비교는 본능입니다.
어떠한 욕망과 욕구 앞에선
나와 상대방을 재어 누가 더 나을까를 고민하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여유를 가져야 하며
사실은 그 여유 또한 일종의 우월감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당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더없이 슬플 것만 같고
당신 품에 다른 이들의 창이 꽂히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4.
결국 현자가 되는 일엔
나는 아직 멀고도 멀었나 봅니다.
남성들이 가진 지위와 정복에 대한 욕구.
모든 남자들은 다 저마다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안 그렇게 보이는 남자들도 어떠한 분야에선
자신의 자존심을 내걸고 창을 뽑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기가 꺾인다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남자가 되고
그 기를 세운다면
하늘에 별도 따다 주려고 하는 것이 남자죠.
그렇게 단순한 생물입니다.
모든 건강한 남성은 '존경'을 먹고 자랍니다.
요새 많은 남성들이 기가 죽은 것도,
행동과 말에 조심성이 가득한 것도,
어렸을 적 존경을 먹고 자라지 못한 탓입니다.
여자들이 보기엔 되게 유치해 보일지 모를 일도
남자들에겐 나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일은
남자에겐 엄청난 굴욕감을 선사해 줍니다.
물론 그로부터 얻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 성장의 발판이 되고
더 나은 남자가 되고자 하는 강력한 계기가 될 수도 있지요.
이렇듯 대부분의 젊은 남성들이 겪고 들어가는 팜므파탈과의 만남은
어찌 보면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그로 인한 상처가 있고 굴욕감을 느낀 적이 있지요.
좋습니다.
인생은 부딪히고 깨지는 것의 반복이고
행복하려 아픔의 반복이라는 것이라면
나는 회피하지 않고
그대 품에 깃창을 꽂기 위해
전쟁에 뛰어 들어가 봅니다.
5.
역사적으로 왕은 대부분 남성이었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여성은 차별을 받아 왔기에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자리는 항상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왕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은
재밌게도 대부분 여왕이었습니다.
여왕이 왕의 자존심을 한 번 긁어주면
왕은 그녀를 위해 칼을 차고 전쟁에 나가죠.
그렇게 공을 세우기도 하고, 반면에 다치고 죽기도 했습니다.
역시 역사는 사랑으로 쓰였다고
남자가 이렇게나 미련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감상(romance)'은 되려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더 취약합니다.
오히려 여성들이 관계에 있어 대개 실리적인 면이 뛰어나죠.
그들에겐 그것이 일종의 생존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자신의 조건을 봐주길 바라고
남성은 조건없는 사랑을 바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라는 질문은 보통 여성들이 먼저 꺼내곤 하죠.
그러면 남성들은 식은 땀 흘리면서 좋은 답변을 내기 위해 온갖 궁리를 하게 됩니다.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사회는 여성과 남성에게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와 욕망의 문법을 가르쳐 왔습니다.
여성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타인의 선택에 의존해야 했던 구조 속에 있었기에,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조건과 연관지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반면 남성은 사회적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존재로 길러졌기에,
자기 자신을 평가되지 않는 순수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길 갈망하는 면이 있죠.
결국 남녀간의 사랑(성애)의 본질은 단순히 성별과 감정의 문제를 넘어
‘인정받고 싶은 욕구’과 ‘안전하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 엮느냐의 문제도 생각하진 않을 수 없습니다.
6.
당신의 거대한 성문을 열고서
검은 욕망의 그림자를 밀어 넣는다.
성벽 너머엔 향긋한 향기와 꽃바람
아직 정복되지 않은 온기들이 숨을 쉰다.
시작의 힘은 언제나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데리고 온다.
나는 기꺼이 깃창을 들고 당신의 심장을 향해 걸어간다.
피가 아닌 숨결로 싸우고
상처 대신 이름을 남기려
이 깃창이 언젠가
한 송이 메밀꽃으로 피어나길
그대의 가슴에 흩날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