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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당신과 함께 이 해변을

by 사색가 연두

1.

당신과의 관계를 약속한 뒤,

불처럼 타오르던 감정을 무르익도록

또 한 번 나를 다스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후- 불면

흩날리는 민들레 꽃씨와도 같고


푹- 누르면

꺼지는 찐빵과도 같고


탁- 치면

날아가는 탁구공과도 같고


찍- 떼면

떨어지는 스티커와도 같아서


이렇듯 자꾸

흩어지고, 꺼지고

날아가고 또 떨어지기에


매번 스스로를

다스리기 바쁘니까요.




2.

한때 세상을 이해하려 들었던

무모한 태도를 가진 적 있습니다.


비이성적으로 흘러가던 세계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저라고 그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이성은 사실

감정의 한 모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계몽이란

인간 역사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무언가를 직접 경험해 보아도

제 틀에서 벗어나기란 힘들 것이며,

무수히 반복되는 실수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헤겔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은,

인간이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역사는 이성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말했죠.


모순입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면

역사는 이성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렸을 적 세계사를 공부하며

중세시대 사람들을

무식하다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미련하게만 보였나 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말이죠.


이념과 사상은

그 사람의 실존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에 도취된 채

정치적 이념에 자아의탁하며 연명하는 현대인들이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일삼았던 신자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요?




3.

상대방의 정보를 캐내는 일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습니다.

대상을 먼저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싹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주 보는 상대방에게 자를 대어

몸부터 장기까지 다 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까요?


아무렴 어떻냐는 듯

현실이란 단어를 방패 삼아 사랑을 뒤로하는 버릇은

자기 방어 기제에 불과합니다.




4.

편견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맞습니다.

솔직히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린 편협한 감옥 속에서 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단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습니다.


인간은 정보에 의해 판단하고 움직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현대 사회에선

우리의 행위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누군가의 언어가 무기가 되고

그 무기는 사방팔방 총알을 쏩니다.

누가 쏘았는지 출처도 불분명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가상의 적을 만듭니다.


"이 사람이 총을 쐈습니다!"


이젠 모두가 그 적을 향해 총알을 쏩니다.

한껏 많아진 총알들은 또 사방팔방 튑니다.

그렇게 더 많은 적군들이 생겨납니다.

혐오와 미움이 사회의 기조가 되어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두가 모두를 믿지 못하고

모두가 모두를 미워하고 혐오할 바에야


차라리 나는

총알을 맞는 일이 생긴다 해도

먼저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5.

최근에 친구들과 함께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생애 처음입니다.

해외로 나가 본 게.


여행을 하며 느낀 건

인간은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스쿠버 다이빙을 해 보았고,

외국인들과 대화도 해 보았으며,

평소엔 먹어보지 못했던 많은 음식들을 맛보아 봤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당신 생각이 나더랍니다.


여자 친구가 있는 제 친구 한 놈은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고 있었습니다.

나도 같이 따라 사 봤습니다.


"너 누구한테 주게?"

"그... 있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려면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법.


사랑은 감정보단

실천으로 행해질 수 있다는 걸 이젠

압니다.


이성은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감정은 행동 앞에서 무너집니다.


앞에 펼쳐진 푸르른 해변을 보며

언젠가는 당신과 함께

이 해변을 보러 가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6.

어느덧 방학이 끝나갑니다.

나는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 지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독서 모임이 아마

이곳에서의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더는 미련이 없어 후련합니다.


아마도 이번엔

당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인원들도

그림자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지상에서의 한 여자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알에서 나오지 못한 어린 아이를

알을 깨고 나온 한 마리의 새로 날아봅니다.


사랑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겐 죄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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