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짊어진 배낭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질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철이 들고, 책임을 지게 되고...
더는 책임질 일을 만들지 말자 해놓고서도
나는 여전히 당신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만남과 이별이 가볍다기엔
당신은 내게 의미가 담긴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벼이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무겁게 살아가렵니다.
적어도 당신에게만큼은
나도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2.
"자."
"뭐야?"
"저번에 줄라 그랬는데 맨날 까먹고 못 줬어. 키링이야."
제가 좋아하는 연두색으로
당신은 네잎클로버가 달린 키링을
내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직접 만드셨다니요,
손재주가 좋은 당신은
여러 가지 물건을 실뜨기로 만드는 걸 좋아하고
또 그걸 사람들에게 직접 선물해 주는 걸 즐기죠.
누군가는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들 물건도
내겐 의미가 담긴 소중한 물건이기에
평소 뭔가를 모으는 취미도
꾸미는 취미도 딱히 없는 나지만
당신 모르게 집에 들어가
가방에다 몰래 걸어봅니다.
3.
어릴 적엔 비가 오면
온 세상 하늘이
물을 주는 샤워기였다.
신발이 젖든, 양말이 젖든
그땐 비마다 얼굴이 달랐기에
밟지 말라는 어른들의 잔소리에도
물웅덩이에 한 움큼 꿈을 쥐고 밟아댔다.
언젠가부터 비가 오면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
한없이 기어 다니고만 싶다.
내 주위 모든 것들이 한때는 다 놀이터였다.
지금은 장애물이고,
거추장스러운 사물들이고,
의미를 붙이고 더하는 것에 지쳐
사람은 늘 그렇게 상실을 걷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언제나 구름에다 이름을 붙인다.
당신이 건넨 네잎클로버는
여전히 내겐 행운의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는 그렇게 상실과 생성을 오가
굳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려 의미를 더하는
미련한 동물이다.
4.
"그날 너... 옆에 남자 한 분 계시던데..."
"응? 언제?"
"월요일 저녁이었나 그랬을 거야."
"아~ 같은 과 신입생 후배야! 선배가 밥 사주는 그런 형식적인 대학 문화 있잖아 훗. 이제 슬슬 나도 고학번이 되고 새내기들이랑 나이 차이가 좀 나다 보니까 후배가 어려워지는 거 있지. 슬퍼..."
저번에 당신과 함께 있던 그 남자가
실은 같은 과 신입생 후배라는 소리를 듣곤
내가 참...
추해지더랍니다.
동시에 안심이 됐던 나는
어쩌면 일종의 우월의식과 함께
자만심 또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의 추한 모습을 마주한다는 것은
참 재밌기도, 한심하기도 합니다.
나도 질투를 하는구나...
그날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하루 종일 당신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더랍니다.
그만큼 당신이란 존재가 어느새
내겐 큰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었나 봅니다.
5.
"우와~ 이거 맛있다!"
"맛있지?"
"응. 중화비빔밥은 처음 먹어보는데 맛있는데? 담엔 친구들 데리고 여기 와야겠다."
"내가 대학 복학하고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때 아빠랑 둘이서 가장 먼저 찾아온 식당이야. 맛있더라고."
"원래 아빠들은 중화비빔밥 이런 거 좋아하잖아."
당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전달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물론 나의 세계가 그렇게나 다채롭고
다양한 거리들이 준비되어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것들도 당신과 함께라면
내겐 또 새로운 의미가 더 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색깔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은
사람이 성장함과 동시에 늙어가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6.
'혹시 시험 끝났어?'
'아니... 아직 안 끝났어..ㅜㅜ'
'아직 안 끝났구나.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에 시간 되면 같이 저녁 먹을래?'
'좋아! 이번 주는 안 될 것 같고 다음 주 월요일에 보자!'
'그래!'
이제 당신에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말을
전하려 합니다.
아직도 무겁습니다.
이번에도 못 할지도 모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지상에서의 한 평범한 여인으로 끌어내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내게 당신은 마치
태양 같습니다.
이것이 환상이란 걸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나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여전히 내겐 순수성이 살아있다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인간은 그런 낭만으로 살아갑니다.
해가 갈수록 무뎌지는 감각과 상실의 익숙함은
익어가는 열매의 필연과도 같나 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나니
세상엔 작은 필연도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만남은 우연이고 변화는 필연입니다.
푸른 꽃을 쫓아 세상을 여행하는 하인리히처럼
인간은 늘 무언가를 쫓기 마련이고
나와 타인과 그리고 매 시기와
매일 이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린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을
잊고 지냈습니까.
그러니,
이젠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