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 한 번,
둘이 같이 길을 걷다 알게 된 사실.
'당신은 여름을 좋아한다.'
"아, 여름을 좋아해?"
"응! 나 여름 좋아해! 여름 좋지 않아?"
...
안타깝게도 난,
여름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덥고... 습하고...
무엇보다도 모기를 정말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여름을 좋아하는 거야?"
당신은 두 손을 모은 채로
아이 같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여름에 피는 장미가 예뻐서!"
2.
사랑한다는 건,
일단 그 사람의 '세계'에 호기심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여름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여름에 피는 장미가 예뻐서랍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여름에 피는 장미를
유심히 관찰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보고
내가 가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새로 만난 사람들과도 저렇게 금방 어울려 다닐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지치는 기색 없이 저렇게 잘 떠들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매번 저렇게 밝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과 만나야 고생을 덜한다지만,
왜 인지 모르게 나와 다른 면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호기심을 품기 마련입니다.
당신의 눈을 빌려 쓰고 싶습니다.
당신이 초대장만 건네주신다면
나는 기꺼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혹여라도 나의 세계가 궁금하시다면
나는 기꺼이 등불을 밝힌 채로
당신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왜 내가 직접 초대장을 건네 줄
용기는 아직 없는 걸까요.
3.
한 세계는 어둡고 고요하며
다른 한 세계는 불빛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이 걸어왔던 낯선 계절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여름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예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 참고로 나는 겨울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눈이 좋아서랍니다.
당신과 함께 첫눈을 맞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그러니 초대하고 싶습니다,
나의 계절에.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럽습니다.
혹여나 나의 찬 바람이
당신의 불빛을 꺼트릴까 봐 두렵습니다.
4.
미성숙한 사랑은,
그 사람의 환영(幻影)을 좋아하는 거랍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기대와 환상으로
상대방의 이미지를 완전히 덮어 버리곤
그 모습만을 사랑하는 것이죠.
그것은 서로를 불쌍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결국 완전한 인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 사람은 왠지 이럴 것 같아.'
'그 사람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사람의 실재를 감추고 포장지로 덮어 씌우는 일은
정말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학교에 장미 핀 거 봤어?"
"어... 아니? 장미가 폈어?"
"어! 엄청 예쁘게 피었던데 시간 날 때 가서 봐봐!"
그렇게 며칠 뒤,
수업을 마치고 혼자 길을 걷다가
갑자기 피어난 당신 생각에 장미를 보게 되었습니다.
유심히 관찰하다 보니
문득 그 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꽃의 실존(實存)을 하나하나 세어 봅니다.
여러 색깔의 장미가 있다.
그중에 붉은 테두리를 두르고
안 쪽엔 하얗게 물든 분홍을 품은,
여러 개의 잎이 회오리를 만들어 내 눈을 하나로 모으는 꽃을 바라본다.
너 밖에 안 보인다.
예쁘다.
꼭 누군가를 닮았다.
갖고 싶지만,
감히 꺾어버릴 엄두도 안 날 만큼 아름답다.
나는,
온 정성을 다해 네가 활짝 웃을 수 있도록 물을 주고 싶다.
언젠가 네가 저물어가는 날이 온대도
그 모습마저도 보듬어 주고 싶을 때에야
나는 너의 실존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6.
상대방의 실재(實在)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결혼을 하고서 많은 부부들이 깨지는 이유도
연애할 때는 볼 수 없었던
상대방의 실재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도 아니고,
순수한 사람은 더욱더 아니며,
생각보다도 더 심보가 꼬여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속물 같은 면도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요.
당신이 바라보는 나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지요.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와 같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지요.
하물며 내게도 묻습니다.
당신의 실재를 마주해도
나는 과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지.
웃기죠,
애초에 우린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