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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나 봅니다

by 사색가 연두

1.

6월 어느 날,

여름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던 날

창문틈 사이로 바람이 수줍게 스며들어와

내게 당신을 전달해 주고 갑니다.

검은 천막 위로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에게

먼저 고백합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나는 당신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나 분명한 건,

요즘 하루 웬 종일 당신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제대로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이것이 만약 사랑이라면,

사랑은 감정보단 상황이고

사랑은 현실보단 환상이며

사랑은 축복보단 저주일 것입니다.


나는 어느새 탐정이 되어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을 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게 왜 그런 말을 던지셨는지,

내게 왜 그런 행동을 보여주셨는지,

혹여나 당신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며

유치한 상상의 감옥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나 봅니다.




2.

인간을 끝까지 괴롭히는 두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안, 또 하나는 공허입니다.

한데 두 감정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걸 아십니까?


불안은 사랑받고 싶어서 안달 나는 것이고,

공허는 사랑하고 싶어도 그 대상이 없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인간은 진실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맞습니다.

또한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다른 감정들에 비해

유독 사랑을 내비치는 일은 왜 그리도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나는 불안합니다.

아, 사랑받고 싶습니다.




3.

언젠가 당신이 꿈에 나온 적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맥락 없이 입술을 맞추었죠.

그때부터였습니다.

당신을 볼 때면 나는 내 심장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온 공간이 흔들리고,

햇빛이 당신만을 비추고,

주위에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가 되어버립니다.


어느 특정한 지점에 꽂히며 피어난 상황은

이리도 맥락 없이 찾아오곤 합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에 굳이 이유를 붙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는 왜 하필 그 대상이 당신이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4.

인간이 무언가에 매달리려 한다는 건 본능입니다.

그건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기들은 무언가를 꼭 쥐고 있지 않으면 생존적인 불안을 느낍니다.

나도 어렸을 적엔 틈만 나면 무언가에 매달리곤 했습니다.

철봉에 매달리거나, 엄마에게 매달리거나, 게임기에 매달리거나.


하지만 성인이 되었어도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언갈 하지 않고서 가만히 있어도 지치곤 합니다.

실은 매일 어딘가에 매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발버둥 치는 모습은 꽤나 볼품없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에게 매달리고 있는 나는 한없이 지치고 힘들지만

동시에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만,

당신과 조금 더 가까이 닿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렵니까?




5.

너무나 많은 상상과 가능성을 모색해 봤습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생각의 방향이 자꾸 그쪽으로만 흘러갑니다.


힘듭니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이루며 고민합니다.


'영화 한 편 보자고 하면 이상하려나?'


'밥 한 번 먹자고 하는 것쯤은 괜찮겠지?'


'하... 근데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그녀도 나에게 아예 호감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평소엔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도,

논리적이고 문제 해결에 뛰어난 사람도,

사랑 앞에선 이렇게 어린아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이러한 상황을 재치 있게 풀어나가는 이들은

이것도 일종의 게임으로 바라봅니다.

참, 그것도 능력입니다.

작은 일을 작게 보지 못하고 크게 키우는 사람에겐

그들의 능력이 그렇게나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상상은 때론 자기 자신을 잡아먹기도 하니까요.


오히려 가능성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에서 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6.

당신과 어쩌다 연이 닿았습니다.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꽤 돈독한 사이를 만들어 갔죠.


당신은 그런 내게 하나의 결함입니다.

내게는 책임이 있었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티를 내면,

그러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나를 자꾸 후회하게 만듭니다.

요령도 없고, 재치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 내게

당신은 자꾸 나를 시험하게 만듭니다.


이럴 줄 몰랐습니다 내가,

고작 이런 일로 하루 종일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상상의 감옥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욕구는

책임과 실천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미움을 사려는 행위는

꽤나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더군요.


별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금방 또 별게 되어버리니

이런 내가 너무 한심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대가가

아직까진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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