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이 단 한 번 뿐이라면,
그건 너무 덧없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럼 만약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어우, 그것도 상상만으로 끔찍합니다.
그러니 삶에 있어
영원회귀나 혹은 비(非) 반복성과 같은 개념은
내겐 전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결국 두 개념 모두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어차피 다
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던진 질문이니까요.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한 순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죽음'입니다.
그러니 내가 짊어진 무게를
마냥 던져버리기란 괜히 무섭습니다.
등이 홀가분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자유 앞에 서겠다는 것과 같으니까요.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삶에다 무거움을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종잇조각과 같이 한낱 가벼운 한 인간이
어떻게든 거센 폭풍에 날아가지 않고서
두 발을 땅에 온전히 디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겠죠.
그렇다면 과연,
사랑에 자격이 있다면
그 책임은 얼마 큼이나 무거운 겁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실
얼마나 가벼운 존재들입니까?
2.
- 'Muss es sein?' ('꼭 그래야만 하는가?)
나는 꼭 당신 어야만 할까요?
혹은,
당신은 꼭 나여야만 할까요?
괜스레 의심이 듭니다.
용기 앞에 주저앉고서
계속 되묻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로 고통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여자는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남자는 많습니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연을 당할 때
눈물을 흘리는 걸까요?
3.
이번 학기 마지막 모임이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원체 말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유독 그날엔
이상하리만큼 더욱 말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당신을 포함한 모임원들의 이야기를 구경했죠.
20대 남녀들이 모여 앉은자리라 그런지
주로 대화의 주제가 '연애'로 흘러가더군요.
"연하가 좋아, 연상이 좋아?"
"외모는 얼마 큼이나 중요하다고 봐?"
"연인과 일주일에 6번 보기 vs 한 달에 한 번 보기."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 내가 어떤 대답을 건넸는지
도무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지금 내겐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니까요.
그래도 딱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점.
인간의 삶은,
인간의 무의미함은,
인간의 가벼움은,
역시 사랑으로 채우는 게,
아무리 봐도 그게 맞다는 겁니다.
4.
홀로 서기를 설파하는 부류들 중
'고독(孤獨)'이란 단어를 남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자신의 결핍과 제대로 마주하기 두려워
결국엔 회피하고 마는 안쓰러운 존재들이라 여깁니다.
친구 없어도 괜찮다.
결혼 같은 건 부질없는 짓이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여기서 잠깐,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잘못 받아들이면 골치 아픈 철학이 따로 없습니다.
사랑을 하는 문화가 없는 곳에서
이보다 더 달콤한 왜곡은 없을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고독(孤獨)'이란,
한 집에 함께 살아도 집 안 어딘가엔
각자의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언약은
'미완성을 견디기 위한 불편한 약속'입니다.
겉으론 안정적으로 보이는 부부들의 생활 속에도
그 이면엔 미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이 있기 마련이죠.
그러니 '혼자만의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고독 없인 다 바보입니다.
결혼을 했어도
한 집에 둘만의 시간이 아닌,
한 사람만의 시간 또한 존중해 줘야 마땅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자들중에선 대개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한 평생을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도대체 왜 사는 가.'
이러한 질문들을 죽을 때까지 달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았죠.
그러니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무거웠기에
그저 가능성을 보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사랑을 하지 말라!'
라고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여성 혐오자였기에
여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고만 살아온,
존재를 너무 사랑하는 데에 있어 온,
즉 그들의 모순.
결국 사랑 앞에선
최고의 겁쟁이었기에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5.
"오늘이 이번 학기 마지막 뒤풀이잖아. 그럼 혹시 다들 모임 내에선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뒤풀이 중 당신이 건넨 파격적인 질문이었죠.
다들 적잖이 당황한 것 같더군요.
나는 솔직히 그 질문을 듣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또한 아무도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 다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구나 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당연합니다.
20대 남녀가 모인 공간에서
그런 사랑의 기류가 아예 없다는 게,
그게 더 이상한 거니까요.
"오빠는 있어?"
"나... 나?"
근데 아무래도,
이 날은 타이밍이 아니었나 봅니다.
한참을 망설이며 식은땀을 꼭 쥔 채
마음속으로 수천 번이나 당신이라 외치고 싶었습니다만,
결국엔 고개를 젓고야 말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난
책임과 실천을 두고 저울질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결국엔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죠.
젊은 우리는,
왜 주저하고 마는 걸까요.
우리는 정말
사랑을 하는 문화가 없이 자랐나 봅니다.
6.
"그럼 이번 학기 정규모임은 이제 끝인 거야?"
"응, 그렇지."
"아쉽네."
"그러게... 아쉽네 나도."
뒤풀이 후 같이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 불안했던 걸까요.
"그래도 재밌었어. 좋은 사람들하고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 고마워!"
"... 다행이네."
왜 당신은 꼭
오늘이 마지막일 것처럼 이야기하는 걸까요.
"오빠는 방학 때 그럼 고향에서 지내는 거야?"
"음... 아니, 가끔씩 내려갈 것 같아."
나는 왜 길을 걷는 내내
당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며 얘기할 수 없었던 걸까요.
"조심히 들어가!"
"... 너두."
나는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 앞에선 입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걸까요.
7.
누군가에겐 그저 스쳐 지나갈만한 인연에
나는 과도한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간단하게 움직이던가요.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우리는 오해 투성이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가벼운 농담도 때론 진지한 고백이 되고
장난스러운 행동도 때론 조심스러운 접근이 되는 법이죠.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이 직접 내게 말하지 않는 이상
알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젠 확실합니다.
- 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무래도 모릅니다.
미련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야 만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도저히 당신을
가볍게만 여길 수가 없습니다.
뒷바퀴도 나름
자기만의 속도가 있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또 한 번 오해하려 합니다.
조금만,
그러니 정말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