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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by 사색가 연두

1.

"너 영화 보러 가는 거 좋아해?"

"영화...? 음 나쁘진 않아."


헤어지기 전,

어떻게든 둘만의 만남을 이어가려

온갖 궁리를 펼치며 수를 던집니다.


"혹시 지브리 좋아해?"

"지브리 좋아하지! 이번에 재개봉한다고 했었나?"

"어..."


그런데 왜일까요,


'혹시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이 말 한마디가

갑자기 너무나도 무겁게만 느껴져

또 한 수 무르고야 말았습니다.


이 한 마디 던져보려

몇 번의 상상을 거쳤는지.


다 부질없었습니다.


당신과 밥을 먹을 때

왜 자꾸 기침이 나오던지

왜 자꾸 목이 막혀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던지


자연스레 웃지도 못하고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아...


너무나도 후회스럽습니다.




2.

결국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린 둘만의 첫 만남에

나는 결국 후회 덩어리만 놓고야 말았습니다.


바보처럼 어설프게 굴기만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획을 상상했지만

단 하나도 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습니다.


세상일이 늘 그렇듯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이론과 실천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다릅니다.


대화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에야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3.

여성은 확실히 남성보다 더

'관계지향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간관계 중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남성과 남성의 관계 보다도

여성과 여성 간의 관계가 가장 취약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여성들은 관계에 있어 훨씬 더 예민하고,

때로는 남성보다 더 실리적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있습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


우린 뭐든지 잘해보려 하다가

사소한 실수 하나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당연합니다.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면

그 대상은 부서지기 마련이니까요.


반면에 남성들끼리의 관계가 보통 오래가는 이유는

딱히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충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인지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앞에만 서면

이상하리만큼 모든 게 어그러집니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너무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온통 실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4.

사랑할수록 더 사랑이 어려워지기만 합니다.

이는 사랑을 단순히 감정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개인이 사랑에 실패하여

관계와 분리되기 시작한다면

결국엔 혼자 '고립(孤立)'되고 맙니다.


고립은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대상이 없는 공허와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불안이 합쳐진,


즉 오로지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합니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은

무수한 환경의 결정체로 이루어 지죠.


사랑은 환경입니다.


사회라는 바닷속에서

많은 이들이 잘해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저마다의 항로를 통해 헤엄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해는 언제나 두렵고 무섭기만 합니다.

도중에 다치고, 흔들리고, 상처받고

그렇게 사랑에 실패하게 되면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마저도 혐오하게 됩니다.


사회로부터 고립된 이들과

당신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나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과 같이

그들 또한 무언가를 그리고

보고 싶어 할 겁니다.


인간은 그런 동물입니다.




5.

타인의 주목과 기대는

나를 한껏 부풀게 만들곤 했습니다.


어렸을 적엔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심리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그게 일종의 '선(善)'이라 믿었죠.


마땅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할 때

그들의 실망의 눈초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 지 몰랐습니다.

사실은 그게 '선()'이 아니었음에도 말이죠.


무언가를 잘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에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물리적인 힘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의 그릇이 아닌 타인의 그릇에 집어넣는 무리수,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만들어낸 과잉된 힘입니다.


고수와 장인들은 자신의 주특기를 선보일 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이 쉬워 보이고

심지어 편해 보이게도 만듭니다.


자신의 그릇에 알맞은 모양을 빚어

빈 공간을 채우는 힘이죠.


하지만 나는 아직

당신이 어렵기만 합니다.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익어갈 뿐

눈에 보이는 수치와 크기는 없으니까요.




6.

내가 지금껏

누군가를 그토록이나 사랑해 본 적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많이 서투릅니다.


당신이 가시 많은 장미일거라 어림잡고서

쉽게 손을 뻗지 못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아닌

부드러운 털이라고

쿡 누르면 찌를 것 같은 아픔이 아닌

내 피부를 간지럽힐 작은 매력일거라고


누군가가 가르쳐줬으면 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재지 않은 거릴 향해 잎을 벗고서

뿌리마저 떼어내며 다가갔던 그 날.


용기와 서투른 섣부름 사이

그 끝엔 맺음뿐이라


당신의 손에 쥐어진 또 다른 꽃 앞에선

눈물 한 방울도 줄 수 없을 만큼

초라해진 내 잎을 봐주길 바라서


이것 또한 내겐 사랑이었어라

미안하고 원망스럽다며


끝까지 어리숙한 씨앗을 뿌린 채

후회스레 나의 꽃을 피우긴 싫습니다.


그러니 다음부턴

너무 힘 들이지 않기로

너무 잘하려고도 하지 않기로.


그저 피어나는 대로

내 마음 따라 피우기로.


애써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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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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