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직 방학 기간이 꽤나 많이 남았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새로운 습관을 하나 들였습니다.
일단 나를 거울 앞에 세워둡니다.
그럼 나의 여러 가지 얼굴이 보입니다.
왜 인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기가 힘듭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 그렇습니다.
나의 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좀처럼 마주하려 들지 않죠.
초하라게 헐 거 벗은 나를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힘들고, 무섭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선
내겐 인정 앞에 고개 숙일 '용기'와
후회를 쓰다듬어줄 '용서'가 필요합니다.
2.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리가 주저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죠.
마지막 독서 모임 이후 뒤풀이 시간 때
나를 포함한 모임원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앞서 '사랑'이란 단어의 폭력성을 고발했죠.
하지만 이것 또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게 모르게 '사랑'이란 단어와 합의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금 머리 아파질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일단 이 점부터 분명히 말해둡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대에 던지는 '잔소리'가 아닌
개인적인 '용기'를 얻기 위한 일종의 '탐구'입니다.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초라한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3.
'용기'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용기는 무조건 '두려움'을 동반해야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성'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용기는 '이성'의 영역일까요?
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용기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이 '이성'을 전제로 두고 말할 순 있어야 합니다.
이성은 철학적 맥락에서
덕 그리고 도덕 법칙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진위와 선악을 식별하는 능력을 일컫죠.
즉 사물의 도리를 인식하고
그에 맞춰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럼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가 사랑 앞에서 주저했던 일은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그럼 그 순간 사랑하는 이 앞에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가 주저했다는 말일까요?
4.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사랑을 주는 행위는
자칫 죄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행위에 있어
아무런 이득도 취할 수 없다고 볼 때,
나를 챙기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죄로 여기는 것.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에 있어
과도하게 조심스러워하고 눈치를 볼 때,
남에게 상처가 될 까봐 두려워 그것을 죄로 여기는 것.
여기서 인간관계는
일종의 이해타산(利害打算)적인 게임이 되고 맙니다.
누군가가 만약
'주고받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자연에게서 그 어떠한 경외심도 느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5.
예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로 여겨졌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즉 바람직한 '모성애(母性愛)'는 적어도 '무조건적'입니다.
반면 자연재해와 같은 경우는
그것을 신의 형벌이라 여겼습니다.
기원전 어느 기점으로부터,
신의 사랑은 어머니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아버지적인 사랑으로 전환을 이루었죠.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
즉 '부성애(父性愛)'는 모성애와는 다르게 어떠한 '조건' 하에서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서른 살 먹은 아들이 집구석에서 나오지 않고 아무런 경제활동도 하지 않으면
하다 못해 밥이라도 차려주는 게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어떠한 눈길도 주지 않을 겁니다.
이와 같이 자연과는 다르게 신은,
어느 정도 이해타산적인 관계 아래에서 인간을 구원하고 형벌한 셈이죠.
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곧 벌을 받게 될 거란 의미가 되니까요.
이렇게 신을 필두로 사랑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조건적인 관계를 당연시하게 여기는 것이 옳게 보여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이해하려는 접근은 졸렬합니다.
내 앞에 모든 인식을 내쳐둔 뒤,
보이지도 않은 신을 끌어다 이해하려는 행위는
무책임이고 게으름입니다.
신과 자연, 그리고 재해와의 연결점은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기에
위와 같은 내용은 애초부터 논리적 회피에 불과한 것이죠.
오히려 각 자연재해의 원인을 설명해 내는 데에는
신이 아닌 과학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실은 과학조차도 아직까진 자연재해를 완벽하게 해석하고 막아낼 순 없습니다.
그러니 과학이 모든 진실을 증명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과학자들은
사실 신학자들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나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나 또한 그 연결점을 어떻게 증명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조리'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형이상학적인 관계를 밝혀내려 애를 쓰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전혀 중요한 과정이 되지 못합니다.
적어도 내겐 그렇습니다.
6.
부조리.
이것은 개인의 이성이 외부 세계의 비(非) 이성과 맞닥뜨렸을 때 찾아오는
'감성(感性)'의 영역입니다.
쉽게 말해
신은 인간의 기대를 의미하고,
자연은 외부의 세계를 뜻하며,
재해는 세계의 비이성을 상징합니다.
재해가 일어날 때 인간이 느끼는 것이
바로 부조리입니다.
도저히 우리 이성으로 판단되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나와 세계 사이의 간극을 느끼게 된다면
그때부터 인간은 심연을 맞게 되죠.
그럼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용기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성'의 영역으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부조리는 명확하게 묘사해 낼 수 없기에
오히려 인간의 이성은 이를 거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기는 그 불확실함을 알고서도 나아가는 겁니다.
막연한 길 앞에서 확신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감성입니다.
우린 사랑이란 감정이 피어남과 동시에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사랑'이란 장벽을 허물 '감성'이 부족했던 겁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부도덕을 인지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저한 것이고
그 부도덕을 밀고 나갈
감성이 부족했다는 말이 되겠죠.
7.
자,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는 일이
왜 부도덕한 일이 되는 걸까요?
앞서 말했듯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곳에선
사랑을 주는 행위가 자칫 죄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죄'를 한 번 물어봅시다.
나를 챙기지 못했다는,
나의 사랑이 남의 상처가 될 거라는,
이해타산적 관계에 의지하는,
'존재'를 돌보기 전에 '소유'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정서(형이상학)에 담겨 있습니다.
8.
언어의 유행은 그 사회의 정서(형이상학)를 반영합니다.
인싸 / 아싸
금수저 / 흙수저
도태남 / 도태녀
테토남(녀) / 에겐녀(남)
(※ 에겐은 '에스트로겐', 테토는 '테스토스테론'의 줄임말로 각각 남자다운 남(여)자, 여자다운 여(남)자를 뜻합니다.)
요새 많이 쓰이는 단어들 중 일부를 모아봅니다.
남을 손쉽게 특정 짓고 싶어 하며
단순하게 구분 지으려 하는 심리가
아주 잘 반영된 모습입니다.
사람의 여러 가지 성향을 무시하고 딱 겉으로만 판단하기 좋은
과도한 MBTI 몰입 서사와 비슷합니다.
(물론 MBTI 이론 또한 깊이 있게 공부해야 잘 알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사람은 절대 '하나'를 알면 '열'을 알 수 있는
학문과 이론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알게 되면 대개 '하나'를 알게 될 뿐이죠.
그럼에도 부조리를 끝까지 나아가기 위한
비극적인 마음으로 저 단어들을 살펴본 바,
인싸와 아싸의 구분은 '허영심'을 나타냅니다.
내가 보는 나보다,
남들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을 더욱 신경 쓰는 정서를 반영하죠.
금수저와 흙수저의 구분은 '증오심'을 나타냅니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 조차
'존재'이기 전에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자본주의적 심리를 반영하죠.
도태라는 수식어는 '좌절감'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척도가
내부가 아닌 외부에 달려있는 애처로움을 반영하죠.
에겐과 테토의 구분은 '혼란'입니다.
성향의 차이에 성(姓)을 붙인 것일 뿐이죠.
하지만 이들과 같은 사례들도 진리가 될 순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인간관계를 대변하기엔 이것도 결국,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도전보단 안전을 중시하는 현대 아이들의 양육방식과 교육방식,
야외활동보단 실내활동을 고집하는 놀이방식과 지나친 간섭이 되어버린 규율,
다름과 개성을 존중하기보단 낙인을 찍는 일종의 문화와
무분별한 SNS와 커뮤니티의 콘텐츠 노출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가 몫이 되어버린 마당에
예전보다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며
지나치게 과잉된 자의식으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데에 급급한
현대인들의 내면적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란'을 반영한다는 형이상학적 가설 이외엔
나로서도 명확한 답을 내어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9.
하지만 저들의 공통점 하나는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감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시를 좋아하고 싶어. 근데 너무 어려워서 손을 못 대겠어."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쳐 봅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시에 대한 감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들어 시는 특히나
명확하게 인지될 수 없는 시인의 정서, 즉 그 시를 지은 한 개인만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듯합니다.
안타깝지만 그러한 이유로
여러 자극적인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문학이 대중들의 눈밖에 나버린 것이 그리 이상하진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대중과 시인 둘 중
과연 이 나라에서 시가 죽어버린 사태에 대해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따르는가를 따지는 건
의미도 없고 유치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런 문제엔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상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성을 일깨우기 이전에,
'알려고 드는 태도'
이것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고
시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10.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작가와 시인을 단두대 위에 올려놓고
해부하는 공부만을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거기다 그들의 육체는 온통 허상 된 것들,
정확히 말하자면 추리에 근거한 교과서에 불과했죠.
알 수 없는 부조리를 이해하려 들기 위해
출제자가 제시한 다섯 갈래길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건
없는 다리 놓고 강 건너라는 식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습관이 된 탓일까요,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때,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찰 때,
그들을 자로 재어 해부하기 바쁘고
거기에 흠을 찾느라 고생합니다.
단언컨대 이런 식으로는
그 어떤 대상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떤 대상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11.
앎을 추구하는 자세로부터 시작된 비극.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계약
오이디푸스의 교훈
팡세 속 인간상 등
나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과연 그 진리는
도대체 뭘 위해 존재해야 하는 건지부터가 의문입니다.
싯다르타는 고행길에 오릅니다.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의 진리를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앎의 욕구로 인해 망가져 버린 자신을 보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때 그는
'사랑'으로 극복합니다.
모든 대상을 알려고 들기 전에
먼저 사랑하려 드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는 우리 시지프의 운명엔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고 동시에 희망 또한 기대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을 소진할 때까지 무거운 돌을 굴리며 올라가야 하는
이 비극적인 신화의 극복 해답.
부조리를 인정하고 고개 숙일 용기,
즉 사랑 밖엔 답이 없습니다.
12.
우린 언젠가 모두 소멸될 것이고
이 땅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날이
한순간의 찰나에 불과하다면
죽음보다 더 두려울 것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용기의 감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태어난 세상에
짊어진 돌이 태산 같아서
우린 얼마나 많은 발을 헛디뎌 왔는지
그럼에도 당신과 나는 아직 살아있고
아직 마주치지 못한 많은 순간들이 남아있고
여전히 계절은 흐르고 심장은 뜁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한 마디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