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치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머리를 쥐어 짜내고,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대며.
나는 요즘 온종일
당신과의 다음 만남을 설계하는 데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이번에 네가 선정해 준 책 있잖아, 그거 최근에 영화로도 나왔더라. 다음 주 모임 활동으로 보러 가는 거 어때?"
오롯이,
단 둘이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차마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다가가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모임이라는 명분 아래에
항상 내 본심을 살짝 숨겨둡니다.
참,
겁쟁이가 따로 없죠.
2.
과연 '우연'이란 게
내가 여러 번 마음속으로 계산한
작은 확률의 총합으로도 이뤄질 수 있는 걸까요?
나는 게츠비를 단 한순간도
위대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심하다고 여겼죠.
그런데 최근 들어
나는 어쩌면 그와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게츠비는 정말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꾸며냈다고 하더라도,
다소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하더라도,
그것도 그만큼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며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위해
장소와 이벤트, 심지어 주변 인물들까지 활용한 그가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대단해 보입니다.
사랑은 정신병이 확실합니다.
나 또한 언제나 그린 라이트를 켜 놓고 있었고,
당신이 그 불빛을 바라보길 원했으니까요.
3.
우리가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날,
아쉽게도 그날 나와 당신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습니다.
좌석의 끝과 끝.
서로를 무심하게 나눠버린 상영표가
우리를 이렇게까지 갈라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
당신이 입을 떼었을 때였죠.
"저기... 이거 제가 직접 뜨개질해서 만든 손수건인데 혹시 가지고 싶은 분 계세요?"
그 손수건...
'연두색'이더라고요.
나는 연두색을 좋아합니다.
당신도 그 사실을 잘 알죠.
갖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것도 무척이나.
하지만 문득 그 손수건이
당신이 나를 생각하며 만든 게 아닐까 하는,
당신이 켜 놓은 그린 라이트가 아닐까 하는,
그런 음흉한 생각 때문에
쉽게 팔을 뻗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바보 같습니다.
왜 나는 항상 상실만을 걷는 걸까요.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진 그 손수건을 보며
당신도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로 저렇게 쉽게 건네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손을 뻗지 못하고
매번 조마조마하게 불빛만 켜 두는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 불빛을 바라봐 주길 바라며
참 미련한 마음만 하나 꼭 쥔 채
조용히 혼자 머무릅니다.
4.
만남이란 건
우연성을 기반으로 이뤄집니다.
우린 분명,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만나게 될진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거니까요.
전 지구 인구수 약 82억 명,
또 그 수많은 나라들 중 대한민국 약 5,000만 명,
또 그 수많은 지역들과 수많은 학교,
또 그 수많은 재학생들 중에서
이 모든 확률을 뚫고
우린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뚫고 마주한 당신의 첫인상.
내가 만든 독서 모임의 인원을 구하기 위한 면접날이었죠.
동그란 안경을 쓴 채 흰 니트를 입고,
말똥한 눈빛엔 햇빛이 담겨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미소도 맑고 귀여웠습니다.
당신이 가장 다루고 싶다던 소설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여기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당시에 난 당신이 이렇게나
내 세상을 흔들어 놓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당신을 볼 때면
만남이라는 게 차라리,
이미 정해져 있던 신의 의도였으면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당신이 눈앞에 그려지면
나는 이 모든 책임을 뒤로한 채,
당신의 연인이 되고 싶기만 합니다.
이렇게 우연이 만들어 낸 실존적인 불안은
피하려고 해 봐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모임의 운영자이자
당신의 연인이 되고 싶은 남자이고,
당신은 내게 모임의 인원이자
나의 연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여자입니다.
나의 꽃잎은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당신이 한 번
후-
불어주기만 해도
나는 금방
알몸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 지독한 자유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나요?
5.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죠.
압니다,
나도 내가 한심합니다.
여전히 모든 걸 우연에 내걸고 당신에게 닿기를 희망하니까요.
근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모든 하루가 감옥이 되어 나를 옭아맵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어설픈 핑계를 만들어
미로 같은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려 발버둥 칩니다.
'그래도 운영자로서... 적어도 다음 학기 때까진 운영을 해야 하니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하니까...'
생각을 접고,
또
접습니다.
발길을 돌리고
또
돌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오려 해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닫고
또
활짝 엽니다.
6.
비 냄새를 맡고서
천천히 눈을 뜹니다.
빗소리가 귓방울에 울립니다.
요즘 들어 비가 자주 옵니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되나 봅니다.
문득,
당신과 함께 비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 오는 날의 장미는
평소보다 더 예쁠 것만 같아서요.
보고 싶습니다.
'다음 주엔 모임 후 뒤풀이를 하려 합니다. 다음 학기 운영 방침도 얘기드릴 예정이오니 최대한 모든 분들이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계획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다음 학기에도 계속 모임에 참여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그저 당신이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나는 또 한 번 애쓰며 확률을 높여 봅니다.
어느새 비가 더욱 굳세게 내리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왠지
우산으로 하늘을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뭐, 젖어도 딱히 상관없습니다.
그냥,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