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가진 것이 없어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현명한 인간.
또 하나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
만족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
갖고 싶어서 종종 불안해하고
가진 게 없어서 무언가를 더욱 원하게 되는...
네,
나는 미련한 인간입니다.
2.
알랭 드 보통은 <불안>(2008)에서
인간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돈도 없습니다.
나는 아직 명성도 없습니다.
나는 아직 이룬 것도 하나 없습니다.
없는 게 천지입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은
역시 당신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베르테르의 노란 조끼를 입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총 대신 펜을 들었을 뿐이죠.
로테를 향한 그의 연정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던가요.
사랑이란 상황은
알게 모르게 당사자들을 기대 속으로 내몹니다.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일은
그 결과에 따라 실망할 수도 있다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다만 나는
아직 그럴 자신도 없습니다.
나는 정말
가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3.
행복할 때 '행(幸)'은
죄인을 끌고 가는 수레를 나타내는 모양을 본떠 만든 문자입니다.
왕이 죄인을 사면하여 데리고 다니는 것,
즉 뜻밖에 목숨을 건진 것에서 '다행(幸)'이라는 뜻이 생겼죠.
반면 행동할 때 '행(行)'은
길을 나타내는 두 개의 발자국을 형상화한 문자입니다.
사람이 길 위를 걷는 모습,
즉 두 발로 직접 나아가는 것에서 '실행(行)'이라는 뜻이 생겼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행복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행복과 행동은
정적인 '운'과 동적인 '의지' 사이에 있는
꽤나 거리가 먼 단어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내게 우연히 찾아온
선물과도 같으니까요.
하지만 나의 섣부른 걸음이
혹여나 그 선물을 날려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이런 바보 같은 걱정이 머릿속을 온통 휘젓고 다닙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발 대신 두 손을 모으는 나는,
역시 미련한 인간이 맞나 봅니다.
4.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가 사람의 행복을 좌우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기대한다는 건
그곳에 있을 어떠한 '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관적인 기대와 객관적인 현실은
언제나 일치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어긋날 때가 훨씬 많죠.
때문에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상황은
괴로움을 안고서라도 자신의 주관에 기대어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걷다
하늘에서 깃털 하나가
내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그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인연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고 넓은 세상 속에서
왜 하필이면 나는 당신을 만나게 된 걸까요.
필연을 믿지 않더라도
동시에 우연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왠지 특별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니 신에게 따져 묻게 됩니다.
이러니 인간이 어찌
기대를 안 하며 살 수 있겠냐고.
5.
때문에 나는 이상형이란 걸 그리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형은 말 그대로 '이상(理想)'일 뿐이니까요.
애초에 이상형을 만나 관계를 이룬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난 진작에 그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 셈이죠.
이건 꽤나 합리적인 접근입니다.
이상적인 사람을 '기대'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이상적인 사람이 된다는 건
어쩌면 정말 불행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계절이 궁금했던 나는,
어느새 내 안의 흐트러진 풍경들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느 날 말합니다.
"난 되게 재미없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만약에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날 닮아 막~ 이리저리 산만하게 돌아다니고, 말도 많고 하면...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해. 난 그래서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 좋아."
아...
왜 또 당신은...
나를 기대하게 만드십니까.
6.
무언가를 곱씹고 되새겨 보는 일은
그것을 가지려 하기 전,
꼭 거쳐야 할 관문 중에 하나입니다.
당신의 계절, 단어, 모습, 취향, 목소리...
아무렴 묻지 않기로 했는데
이제는 궁금합니다.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요?
7.
"오빠는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돼?"
"어...?"
그날의 모임 주제는 아마도 '사랑'이었나 봅니다.
어느새 화제는 각자의 이상형 얘기로 흘렀고
모임원들은 너도나도 자기만의 취향을 말하기 시작했죠.
당신의 질문에
나는 혼자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밝은 사람?"
"밝은 사람? 어떻게 밝아?"
심장이 온몸에 경적을 울립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뗍니다.
"뭐랄까... 보았을 때 물음표가 생기게 만드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는 것 같아. 저 사람이 보는 세계는 어떨까... 하며. 또 내가 평소에 말도 잘 안 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조금 어두워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랑 또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 있잖아. 맑고 말랑말랑한 사람들."
"흠... 어려운데."
어려운가요,
근데 알고 계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그 자리에,
나는 몰래 당신을 꺼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당신 떠올리며 말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