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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Aug 17. 2023

마라 속 상큼한 사랑

나물탐방 3. 쑥갓

 

 회사 동기 B와 저녁에 마라탕을 먹었다. 직장에서 누구와 친하냐고 묻는다면, 어렵지 않게 B를 꼽는다. 직장인으로서 지켜야 할 '선'에 대한 기준을 미처 정립하기 전인, 신입직원 연수교육 때 버스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일까. B와 단둘이 있으면 곧잘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한층 높은 음역대로 대화하게 된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B와 사는 곳이 가까워져, 한결 편하게 집 근처 혹은 서로의 집에서 약속을 잡는 장점이 생겼다.


 식당은 앞서 B와 한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이전에는 간만의 마라탕 주문이라 욕심 내서 '2단계 중간 매운 맛'을 골랐다. 본래 매운 음식을 좋아해 맛있게 먹었지만, 이번에는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빨강 식단은 식도와 위가 걱정됐다. 마라 맛이 너무 은은해 아쉽지는 않을까 고민했지만, 끝내 1단계 순한 맛을 먹기로 결정했다. (맵기 조절은 0단계부터 3단계까지로, 1단계에도 고추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긴 하다.)


 대신 식재료 선정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았다. 바로 마라를 이길 다른 향 나는 식재료를 잔뜩 투하하는 것.(대부분의 마라탕/마라샹궈 식당이 그렇듯, 이곳 역시 각자 스테인리스 그릇에 채소, 면, 고기 등 직접 식재료를 골라 담아 직원 분께 드리면, 전체 무게를 측정해 가격을 산정한다. 원하는 맵기는 이때 말하면 되며, 그 후 내가 담은 그릇이 조리공간에 들어가 마라 국물에 끓여져 나온다.) 보통 마라탕을 먹으러 간 이상 내가 고른 식재료에도 특유의 얼얼함이 낙낙하게 저며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피나 질감상 소스가 촉촉하게 잘 베어드는 메추리알, 연근, 목이버섯, 청경채, 피쉬볼, 어묵, 옥수수면(분모자보다 얇아 소스가 더 잘 묻는다)을 집어 들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이 다르므로 마라에 대적할 고수와 쑥갓에 눈길이 갔다. 고수의 맛은 비교적 명확하게 알지만, 쑥갓은 그 자체의 맛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어서 최종 선택했다.


 최근 B와 연애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각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던 과정, 상대의 마음을 추측했던 때, 스스로 상대와 교제를 결심하게 되는 계기 등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아무렴 '나 혼자 연애하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와 연애하는지에 따라 앞서 우리가 말한 것들과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는 둘 다 동의한다. 딱 떨어지는 결론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 고민하는 B의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오래도록 함께 머리를 맞대게 된다. 내가 애인에 대해 말하는 표정만 봐도 대신 설렌다는 B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 것이려나.


 집게로 크게 두 움큼 집었던 쑥갓이 마라 국물에 흐물해진 채로 그릇에 담겨왔다. 쑥갓에서 정말 옅은 쑥향이 날까? 젓가락으로 하나 집어 냄새를 맡아보는데 아쉽게도 크게 향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먹어보니 그제야 우동 위 고명으로 올라가던 쑥갓의 모습이 떠오른다. 잎은 부드러운데 줄기 부분은 살짝 질겨 열무김치를 뜨거운 국물에 끓이면 비슷한 식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쑥갓 역시 국물을 쉽게 머금는 재질이라 매콤함과 은은한 향긋함이 번갈아 혀에 닿는다. 마라탕에 기대하는 자극적인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포근해졌다. 국물 속 숨어있는 쑥갓을 쏙쏙 수저에 건져 올리며 짐짓 무심하게 B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호감 가는 상대와 이전보다 가까워졌다는 대답을 듣자 괜스레 미세한 단맛과 상쾌함도 느껴지는 것 같다.

 

 서양에서는 쑥갓을 먹지 않고 관상용으로 키운다. 화단에 삐쭉삐쭉 갈라진 쑥갓잎이 있으면 보기 좋을까 의아했는데, 내가 먹는 잎만 달린 게 아니라 국화 계열 꽃이 핀다고 한다. 사진을 찾아보니 '상큼한 사랑'이란 꽃말이 이해 갈 만큼 귀엽다. 노란 중심부는 암술 수술이 동그랗게 모여있고, 그 주변을 둘러싼 꽃잎들은 끄트머리에 갈수록 서서히 흰색으로 연해지는 모양새다. 마라탕에 쑥갓을 아무리 많이 담더라도 꽃을 보지 않은 이상, 상큼함을 연상할 순 없을 것이다. 애초에 마라탕에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그래도 쑥갓이 머금은 향이 궁금해 맵기 단계를 낮춘 것처럼,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발견이나 시도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마라 먹다 상큼한 사랑 얘기를 나누고, 그것을 시작으로 여러 얘기를 나누다 자정에서야 파할 줄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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