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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Aug 09. 2023

별점

때로는 소설도 써볼 생각입니다(2021, 2022)


"그러니까 지금" 새아는 지금의 상황을 애써 정리해보려 했다.

"너가 지금 내 꿈속에 들어온 거지?"

민하는 오른쪽 눈썹에 유독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씰룩거리는 입술과 장난기 어린 눈빛을 미뤄보아 화난 것은 아니었다.

"아까 말했듯이 내 하루 끝은 누군가와의 대화야.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서 너 꿈인지 나도 잘 모르겠네."

침대 밑 안경을 집어 쓴 새아는 민하를 자세히 바라봤다. 또래 남자애들에 비해 하얀 피부와 채 빠지지 않은 젖살로 유독 어리게 보이던 그였다. 그리고 왼쪽 눈가 아래 저 점. 광대 밑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점들에까지 시선이 흘러갔을 때, 비로소 새아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울렁거림을 인정했다.


-


"누구랑 대화했는데?"

"많지, 엄마랑 민혁이 형이랑 경비실 아저씨랑. 아참 김주영 쌤이랑도 했다. 너 소식은 모르시던데, 연락 좀 하지 그랬어."

김주영 선생님, 엄하지만 다정한 분이셨다. 나중에 동생 반도 맡으셨고. 바로 옆 중학교로 진학했는데 어째 한 번도 안 갔을까. 멋쩍어진 새아는 화제를 돌렸다.

"보통 어떤 대화를 해? 이게 너의 일과라면, 그다음 날은 어떻게 찾아오는 거야? 대화가 끝나면 되나."

방안을 기웃거리던 민하가 동작을 멈추고 새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눈웃음을 거둔 민하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귀염상 소년에게도 사춘기는 찾아오는 법이라 웃어 넘기기에는 서늘하고 외로운 낯빛이었다. 새아는 다시 한번 울렁거렸다. 왁자지껄한 교실 속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유난히 맑게 웃다가도 이따금씩 나오던, 저 표정. 8년 전 민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냥, 너가 기억하는 나와의 하루를 얘기해 주면 돼."


-


"우리가 엄청 친한 사이까진 아니었지? 그맘때 보통 같은 성별이랑 더 뭉쳐 있으니까. 그냥 나에게, 너는 주변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곧잘 웃긴 얘기도 하는 반 친구였어. 그리고 민혁이 형."

새아는 민하의 가족을 어떻게 지칭하고 시제를 붙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민혁 오빠..가 너를 정말 아끼잖아. 너도 잘 따르고. 그 모습이 유독 좋아 보였어. 아 생각해 보니까 우리 같이 방과 후 수업 때 컴퓨터 배웠다."

"아.. 포토샵! 형이랑 나랑 너랑 첫째줄에 앉아서 배웠던 거 기억나. 근데 내용은 다 까먹었어. 요새도 포토샵 써?"

"나도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큰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동작 그대로 따라 하기만 했고, 내 걸로는 못 만들었어. 요새는 업그레이드되어서인지 잘 몰라도 좀 더 쉽게 사진 수정할 수 있고 그래."

생각지도 못했던 일화를 찾자 둘의 목소리는 한껏 들떴다.

"난 너가 열심히 배우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 이름은 기억 안 난다."

"나도,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오히려 놓칠 때마다 너가 옆에서 먼저 한 거 보고 간신히 따라잡았어. 뭐를 합성하고 제거하고 그런 건 모르겠고, 형광빛 도는 색상을 필요한 부위에 잔뜩 칠할 때가 제일 편했다."

큭큭대는 민하가 맞장구쳤다.

"맞아 그리고 집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이 없는 것도 마음 편했어. 이미 다들 집 도착했을 시간이니까, 내가 학교를 나설 때 보이는 내리막길 끝까지 아무도 없는 거야."

"희한하게 컴퓨터 방과 후 끝난 날은 항상 날씨가 좋았던 것 같아. 가을이었나."

해는 눈부시지 않을 정도로만 따듯하고, 같이 수업 끝난 몇 명의 실내화가방 흔드는 소리가 적막을 깨우던 그때. 두 형제와 새아는 나란히 하교하곤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해서 셋이 서로의 보폭에 맞춰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조금씩 대화도 했겠지. 새아는 자신에게 흐릿해진 그때의 대화들을 민하는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내가 도움 줄 수 없는 장면을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았다. 민하가 그간 부지런히 모아 담은 하루들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지길 바랐다.

"민하야"

교실에 없었고, 방과 후 수업도 끝났다. 전학 갔다 했고, 민혁 오빠를 아파트에서 한두 번 마주쳤다. 무엇이 먼저인지 모를 사건들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돌아다녔지만,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다. 확신 대신 울렁거림을 택했다.

"너의 옆모습을 보면, 얼굴에 있는 점이 마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게 참 예쁘더라."

눈물자국처럼 슬퍼 보이던 때도 있었다. 실제로 '눈물점'이란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새아는 한동안 민하를 떠올리지 않고자 애를 썼다.

"그래서 꼭 말해주고 싶었어. 그게 너 매력점, 별점이라고."

"그럼 난 별점 후하게 받는 거네. 5개 넘어, 7개? 8개쯤일걸."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치는 민하의 재치에 새아도 미소를 지었다.

"맞아, 오늘 대화도 별점 충분했다. 너 덕에 하루를 찾은 기분이야."


-


그 후로도 민하는 종종 새아의 꿈에 찾아왔다. 새아는 본래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 빈도가 잦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처럼 푹 자고도 조금 더 빈둥거리며 다시 잠든 주말 아침이라거나, 출장차 탑승한 ktx에서 잠깐 잠에 들었을 때, 그리고 커피를 마셔 심장이 두근거린 채로 어찌어찌 눈을 감은 날이면, 아니 어떤 조건이라 할 것 없이 그저 새아가 민하를 만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순간마다였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보통 꿈을 꾸면 희미해지곤 하잖아. 그런데 너와의 꿈은 일회성이 아니어서인지 점점 누적되고 그것이 깨고 나서도 기억에 남는다?"

"새아 너가 기억력이 좋은 것일 수도? 너 항상 나를 만나면 지난번 대화 때의 맥락을 용케 찾아 다시 이어가곤 하잖아."

"맞아 내가 주변 사람들을 잘 기억하는 편이긴 해. 그래도 꿈에서는 처음인 걸. 민하 너는 어때? 너가 여기 오겠다고 마음먹으면 와지는 거야?"

"음 잘 모르겠어. 나도 너와의 대화를 곱씹다가, 그냥 어느 순간이 되면 어떤 조그만 방문이 눈앞에 그려져. 그리고 거기를 열면 지금 이 공간에 도착해. 내가 대화를 생각해서 방문이 생기는 건지, 방문이 생길 무렵 대화를 다시 상기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네."


-


새아와 민하는 어느덧 서로의 근황을 알게 됐다. 민하는 초등학교 이후는 속세의 몸이 아니었기에, 근황의 비중은 주로 새아가 차지했다. 대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하고, 이별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앞으로의 인생을 고민하고,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고 칭찬하는 그 속속의 것들을 민하에게 말하는 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민하 역시 새아를 통해 과거가 생생해지곤 했다. 나를 그토록 아끼던 친형의 웃음과 손길부터, 방과후특강으로 듣던 포토샵 수업에서 컴퓨터와 컴퓨터 간 손가락을 대고 전기를 경험하던 순간까지. 당시에는 단조롭고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새아의 입을 빌려 듣는 그 이야기들은 따스함이 묻어 그리워지곤 했다.

"민하야, 그냥 너가 계속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어."

새아는 자신의 옷보풀을 만지면서 별생각 없이 말한다는 듯, 그렇지만 오래도록 고민한 듯한 눈빛으로 끝내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정말 너가 좋았거든, 그리고 티 없이 밝은 미소에 볼 위 별점들까지. 항상 눈이 가는 친구였단 말이지. 그래서 정말.. 너가 그런 선택을 한 게 난 믿어지지 않아."

민하는 미소 없이, 그러나 따스한 눈빛으로 새아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무엇 때문에 그랬냐는 질문이 참 덧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잖아. 그래서 그걸 대답하진 않아도 돼. 대신 그냥.. 너가 지금은 그때보다 더 행복하면 좋겠어.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핑계로, 너가 꿈에 찾아오기까지 부정했어서 미안해. 나 정말 그냥 너가 꿈같은 존재라 생각했어. 나에게 민하란 친구가 있었던가? 있었다면 왜 사라졌지? 그냥 전학을 간 것인가? 그렇다면 민하 형은 왜 그 이후에도 학교에 다녔던 걸까? 이렇게 말이야."

민하가 새아에게 한발 다가와서 가만히 어깨를 어루어만졌다.

"그게 너가 날 기억해 준 거야. 그래서 내가 여기 올 수 있었고. 그때보다 더 행복한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래도 그냥 이런 상황이 온 것에 감사해. 새아 너도 앞으로의 생활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민하와 새아 둘 다 오늘의 대화가 마지막일 거라곤 짐짓 알 수 있었고, 둘은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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