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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Sep 23. 2023

그리운 취향(4)

작품명 확정

 그림을 그릴수록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하는 이유가 늘어난다. 정적인 사물을 그릴 때는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생동감이 더해진다. 반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면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알고 있던 존재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그림 그리기가 즐거운 이유는 나의 관찰과 표현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애정이 샘솟아서가 아닐까.


<작품 3.5 > 그리운 취향

 이왕 집에 장식해 두기로 했다면 좋은 기운을 받고자 밝은 분위기의 그림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최근에 경험한 어떤 순간이 인상적이어서, 색감이 다소 어두워질 걸 각오하더라도 그리고 싶어졌다. 9월로 진입했지만 여전히 덥고, 예년과 달리 한반도에 2차 장마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에 괜스레 습하게 여겨지는 어느 날이었다. 퇴근 무렵 예상치 못하게 폭우 수준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무실 서랍에 방치해 두었던 고장 난 우산에 기대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이미 한 차례 웅덩이에 신발이 빠져 울적했는데, 차 안에 펼쳐진 신기한 문양에 절로 '우와' 소리가 나왔다.


 홀린 듯 계속 보다가 영상을 찍어두었다. 그림 그리기 위해 계속 돌려보는데도, 어쩌다 그런 문양이 나왔는지 통 모르겠다. 대략적으로는 '차 앞문으로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멀리 켜진 가로등 불빛에 의해 그림자가 생겨서'란 걸 알지만, 이런 순간을 여태 한 번도 목격하지 안 했을 리는 없다. 강하게 유리창에 부딪히는 탓에 물방울 타원형이 유독 길게 형성되고, 불빛도 최적의 각도로 차에 내리쬐었던 것일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로 인해 그림자는 계속해서 일렁였다. 마치 조도가 낮은 실내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 아래 서 있는 느낌이었다.


 스누피와 우드스톡이 빗소리를 들으며 아늑한 실내에 머무는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본 물방울 그림자들을 주전자 주변 배경으로 채워갔다. 처음에는 연필로, 그다음에는 그림자의 짙은 정도가 다른 것을 표현하고 싶어 샤프 각도를 달리해 진함 정도에 구분을 뒀다. 과학교과서 속 세포나 DNA 모양 같기도 했으나, 그리는 동안 잡념을 떨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색상 칠하기에 집중하며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오디오북을 청취했다.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며 겪는 희로애락과 노하우를 공유한 에세이인데, 동거인이 없을지라도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우는 책이라 종종 찾는다. 내가 혼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서 위안을 받는 것은, 다른 이들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겠다. 저 멀리 일렁이던 가로등 불빛을 노란색, 주황색 색연필로도 은은하게 표현하고 나니 제법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왔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이자 담고 있는 대상을 따라, 최종 작품명은 <그리운 취향>이다. 당분간 냉장고 문 앞에 붙여둔 채, 오며 가며 23년 9월의 조각들을 떠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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