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침대옆버스 Oct 08. 2023

그리운 취향(5)

거.목을 아시나요

 스누피 배경을 끝으로 분간 혼자 그림 그릴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마음먹었던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고 마침 회사 일이 바빠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던 상반기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무탈하게 대응하고 있다. 긴급 자료가 휘몰아치는 건 비가역적이지만, 무기력한 감정에 휩싸이는 건 거부할 수 있게 됐다. 그럴 때마다 기계적으로 일 처리에만 집중하자고 되뇐 덕이다. 너무 힘들지 않으려면, 때로는 힘 빼는 요령도 필요한가 보다. 마침 J는 나의 행보를 응원한다며 색연필 12종을 선물했다. 받자마자 끄적여보았는데 집에 있던 색연필보다 훨씬 진하게 발색되고 발림성이 부드러웠다. 고백건대, 이번만큼은 무엇으로 그릴지가 무엇을 그리겠다는 마음보다 앞섰다.


 색연필과 함께 받은 꽃 '거베라'를 그려보기로 했다. 처음 알게 된 꽃인데 J가 거인 할 때 '거', 배스킨라빈스의 '베라'라고 말하니 한 번에 외워졌다. (얘기를 듣고 나는 배스킨라빈스는 '베'가 아닌 '배'라고 정정했다. 이 역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따끈따끈하게 머리에 저장돼 있는 정보다.) 거배라 두 송이 모두 노란 계열이었으나, 조금은 색상이 달랐다. 한 송이는 연노랑이고 한송이는 그보다는 조금 더 주황색이 섞여있었다. 암술수술 색이 연두색인지 검은색인지도 달라서, 본래 같은 색이어야 하는데 성장 속도가 다른 건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국화과 꽃이라는 거베라는 중심부부터 바깥까지 꽃잎들이 겹겹으로 덧대져 작은 해바라기 같았다.


 식탁에 둔 거베라를 오며 가며 관찰했다. 풍성한 꽃잎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꽃머리를 지탱해 주는 두꺼운 줄기였다. 특히 꽃과 맞닿는 꽃받침 부분은 나무뿌리처럼 여러 줄기로 나뉘어 견고하게 이어진 모습이었다. 왕관을 탐하는 자 그 무게를 버티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꽃송이 무대를 펼치기 위한 백스테이지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거베라는 수확 후 물에 꽂으면 화경 꺾임, 다른 말로 목 굽음 현상이 금방 나타나는 품종이라고 한다. 그 이유가 꽃송이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잎이 시들기도 전에 확 아래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새로운 각도에서 꽃을 보게 돼 신기하기도 했다.


 거베라와 목굽음 모두 처음 알게 된 것들이다. 이들을 새로운 색연필로 스케치 없이 쓱쓱 그려보았다. 물에 담긴 줄기 부분은 착시로 인해 다시 한번 꺾여보였다. 두툼한 줄기와 노란 듯 주황인듯한 꽃잎 그리고 화병 대체제로 꽤나 유용한 파스타소스통을 각 색에 맞게 표현했다. 지난번에 느꼈듯 색이 확실히 선명했다. 밑그림 없이 그림 그리는 것도 손쉽고 재미있다. 그리면서 거.목을 다시 한번 제대로 외울 수 있었다. 가끔은 새롭거나 기억하고 싶은 경우에 스마트폰 메모장 대신 색연필을 꺼내야겠다.


이전 04화 그리운 취향(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