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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Sep 08. 2023

그리운 취향(2)

벼분수와 꿈뻑오리


 (이어서) 아직 액자가 남았다. 내가 촬영한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인화할까 싶다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취향을 직접 그려보기로. 그림이란 건 참 이상하다. 분명 우리 모두 한때 화가로 활약했다. 학교 미술시간 때 스케치북에, 화선지에, 고무판화에. 먹물로, 크레파스로, 사인펜으로, 수채화물감으로, 포스터물감으로, 파스텔로, 지점토로, 수수깡으로 다양한 창작물을 책상 위에 진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점점 취미에 '그림 그리기', 장래희망에 '화가'를 적는 이가 줄어들었다. 대입을 위해 미술 수업이 자습으로 대체되어서일까. 마음먹고 시간과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일까. 재료가 없다기에는 쉬는 시간 친구들과 종합장에 각자 캐릭터를 그리고 지우개로 여러 번 수정하면서까지 레벨 업하며 잘 놀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서툴러도 새로움에 설레는 마음보다, 응당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사회적 시선이 신경 쓰여서일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미술시간마다 무엇을 만들지 오래 고민하다 시간에 쫓겨 우당탕탕 마무리 작업을 하곤 했다. 좋게 말하면 기획구상 단계에 신중했고, 나쁘게 말하면 '용두사미'형이었다. 한 차례 집중으로 잔뜩 두 볼이 상기된 채 배경을 미처 채색하지 못하고 제출하는 일이 잦자, 하루는 선생님께서 "완벽 이전에 우선 완성을 해야 상장 후보에 들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요지는 '주어진 시간을 효과적으로 안배하자'겠지만, 당시에는 '엇 그래도 내가 상장받을 정도로 잘 그리나?' 싶어 으쓱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시간 제약과 주변에 대한 의식 없이 오롯이 '혼자' 그리면 된다. 업무 중 영상 편집을 한다거나 여행에서 좋았던 순간을 기록하는 용도로 작게 끄적여본 적은 있으나, '한 달 동안 그림을 그려보겠다'라고 다짐한 건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빈 종이를 보는데 무엇을 그려야 할지 생각보다 감이 오지 않았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긴 해도, 예전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상상한 대로 스윽스윽 연필을 움직이고 싶은데! 최근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거위인지 오리인지 모를 새떼를 만난 일? 예상을 꺠고 만난 스누피 피규어? 마침 두 순간 모두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래, 우선은 모방부터 시작하자.


<작품 1> 벼분수와 꿈뻑오리

 대전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원 KAIST에는 오리가 살기로 유명하다. 얘기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었는데, 올해 벚꽃구경 삼아 갔을 때 오리들이 꽤나 크고 많아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오리가 여럿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고, 얼마나 더 많아졌을까 궁금해져 뒤늦게 늦여름에 방문했다. 이미 어른아이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오리들이 한껏 모여 있었다. 분수가 작동되는 시간이어서인지 오리들이 모두 육지로 나와 호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세 좋게 한 덩어리인 채로 위로 솟아올라, 아래로 내려올 때는 조그마한 덩어리로 나눠져 샤아아 떨어지는 새삼 신기했다. 액체야말로 점, 선, 면이 다 구현된다. 타원형으로 길쭉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막상 그림으로 그리니 벼 같아서 조금은 아쉽다.


 어릴 때 에버랜드에서 만났던 북극곰과 달리, 때 타지 않고 뽀얗게 흰색이고 보기만 해도 폭신해 보이는 오리들의 깃털이 신기했다. 그중 한 마리는 잠이 오는지 꿈뻑꿈뻑 눈을 감는데, 그 모습이 귀엽고도 평화로웠다. 처음에는 유독 무리와 떨어져 있어 외톨이인가 걱정했는데, 뒤뚱뒤뚱 걸어갈 때 아랫배만 쳐져있는 뒷모습을 보니 알을 품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날 관찰하면서 처음으로 오리 물갈퀴 뒤편에도 작은 발톱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사람으로 치면 구두 뒷굽 같은 것이려나. 사진을 따라 그리면서, 기존에 그리던 것보다 여러 굴곡, 콧구멍, 물갈퀴 간 연결지점 등을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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