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크네 Feb 20. 2024

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과 결혼하고 싶다

<제인 에어>와 제인 오스틴

말해두겠는데, 미스터 다아시와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는 한니발 렉터나 셜록 홈즈처럼 픽션 속에 있어서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는 그를 현실에서 만나면 걷어차서 38선 너머 북한까지 날려버릴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오스틴의 소설 그 자체다. 이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첫사랑이었던 <제인 에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인 에어>를 처음 읽은 건 스무 살에서 스물 한 살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간밤에 펄펄 내린 눈이 지저분한 빙판으로 얼어가던 어느 오후, 나는 시내 롯데리아의 2층 와인색 비닐소파 구석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비밀스러운 고용주 로체스터와 단정하고 지적인 가정교사 제인 에어의 벽난로 앞 플러팅을 눅눅한 감자튀김과 함께 씹어 먹었다.


말 그대로 혼이 나가는 독서였다. 그 시절 <제인 에어>를 읽으며 느낀 감정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은 진짜 사랑보다 훨씬 웅장하고 극적이었다. 술에 취한 것 같고, 사로잡힌 것 같고,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은 압도적 감각의 향연이었다.


남자주인공 로체스터는 부도덕한 탕자였고, 소설도 그처럼 도착적인 매력이 있었다. 여자주인공 제인은 바르고 태산처럼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그 덕에 작품은 도덕적으로 균형 잡혀 있었다. 제인이 로체스터의 유혹에 무너지기보다는 제 존재를 선언하는 장면이 좋았고, 다락방에 숨겨둔 미친 아내의 정체가 드러난 후 로체스터가 허겁지겁 내민 정부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제인이 끝까지 거부한 것에 홀딱 반해버렸다.


나는 그 후 아주 오랫동안 <제인 에어>를 사랑했다.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마이클 패스벤더가 등장한 2011년도 영화(다소 실망스러웠다)를 보았고, 2006년도에 제작된 BBC 드라마(이건 꽤 만족스러웠는데, 각색과 감정선이 좋아서이지 두 사람이 침대 위를 뒹굴어서는 아니다. 진짜다.)를 보았고, 똑같은 방송국이 제작한 1974년도 드라마(맙소사, 로체스터가 너무 잘생겼잖아!)를 보았고, 1996년의 영화(사랑해요,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보았고, 1943년도 흑백필름 버전의 영화(로체스터를 <시민 케인>의 감독으로 유명한 오손 웰스가 연기했는데 영상 리메이크 중 가장 싱크로율이 좋았다. 특히 그 크고 검은 눈이)를 보았다.


구할 수 있는 영상물을 다 본 후에도 나는 가정교사 시절의 제인을 쫓던 로체스터처럼 <제인 에어>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영국 내셔널 시어터에서 올린 연극 <제인 에어>의 공연실황을 보러 작은 여행을 떠났다. 버스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가며. 뮤지컬 <제인 에어>의 OST를 들으며 한국 라이선스 공연 소식을 서치 하는 일은 내게 주기적인 루틴이었다.


그 시절 나에게 열정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제인 에어>라고 답했을 것이다. 제인이 로체스터를 사랑하듯, 나는 샬럿 브론테의 작품을 사랑했다. 잠깐 스친 감정이라기에는 역사가 길고 추억도 많았다. 문학이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차가운 매체라 해도, <제인 에어>를 통해 나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과도 나누기 힘든 농도 짙은 관능을 경험했다.


그러나 지금, 서른세 살에 이른 나는 더 이상 제인 에어를 읽지 않는다. 책등 모서리가 닳고, 너덜너덜해진 표지를 테이프로 어설프게 붙여놓은 민음사 버전의 <제인 에어>는 몇 년째 손을 타지 않고 책꽂이에 얌전히 놓여있다. 2022년에 초연한 뮤지컬 <브론테>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어느새 <제인 에어>는 내게 향수를 자극하는 첫사랑 그 이상은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십 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던 고갯길이 무척 힘겨웠던 탓이다. 글을 쓰는 삶에 확신이 없었고 전망도 깜깜했다. 가족들과의 삶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힘겨웠고, 가족 외의 인간관계가 전무하다시피 해서 그 중압감이 더 컸다. 삼십대라는 나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숟가락은 소화를 하든 말든 자꾸만 나이를 퍼 먹였다.


격정, 애증, 열망 따위를 섭취할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제인 오스틴을 읽기 시작했다.


샬럿 브론테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를 알 만 하다. 오스틴의 소설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다. 로맨스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프러포즈 장면은 설명으로 끝내기 일쑤고, 사랑의 도피와 집시의 습격과 같은 극적인 장면도 스치듯 지나가는 터라 흥미롭지가 않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평일 정오 무렵에 거실 소파에 늘어져 인간극장을 보는 기분이 든다. 하품이 날 정도로 평온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그런 소설이 필요했다. 내 삶에는 고통스러운 번민들이 중첩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손을 대지 않은 유일한 오스틴 소설인 <맨스필드 파크>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맨스필드 파크>는 내게 또 다른 <제인 에어>가 되었다.


<맨스필드 파크>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중 가장 인기 없는 작품이다. 독자들의 무관심으로는 고딕소설 패러디물이라는 엄청난 진입장벽이 있는 <노생거 애비>와도 견줄 정도이니 얼마나 상업적인 매력이 없는지는 알만한 노릇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여자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까무러치게 매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패니는 소심하고 고지식하고 재치도 없는 데다 보기에 따라 위선적인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 마치 데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 속 ‘나’와 같은 인물인데, ‘나’가 ‘레베카’에게 패배했듯 패니는 오스틴의 여주인공 누구와 견주어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무색무취의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패니 프라이스가 좋았다. 부유한 친척집에 맡겨져 화려한 사촌들에게 무시당하며 자아가 한없이 위축되어 있는 패니 프라이스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패니만큼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았지만 못지않게 겁에 질려있고 세상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맨스필드 파크 식구들 중 유일하게 패니를 보살펴주는 에드먼드 같은 존재도 없었다.


만일 패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쭉 패배하는 인물이었다면 나는 <맨스필드 파크>를 그토록 자주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지위는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그 극적인 변화는 헨리 크로포드가 몰고 온 것이다. 임자 있는 여자와 시시덕거리다가 사회적 지탄을 받지 않는 선에서 발을 빼는 몹쓸 인간쓰레기인 그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패니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의 마음을 빼앗기로 결심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본인이 패니에게 진심이 되어버린다.


헨리 크로포드가 청혼해 왔을 때, 소심한 패니가 그 청혼을 거절하는 데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알 것 같았다. 헨리는 돈이 많고 처세력도 좋아 맨스필드 파크의 가주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는 남성이고, 패니는 가진 것 없는 17살의 객식구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패니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짝사랑 상대 에드먼드를 포기할 수 없기도 했지만, 바르고 고지식한 패니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한량짓이나 하며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헨리 크로포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로체스터의 사랑을 거절한 제인보다도 더 강한 용기였다. 제인은 손필드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가정교사로 밥벌이를 할 능력이 있었다. 그에 비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패니가 청혼을 거절해서 얻을 거라고는 주변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뿐이었다.


헨리의 아내가 되었을 때 패니가 얻을 이득은 컸다. 경제적으로 안정될 터이고,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속물적인 기대이기는 하나, 오만한 친척언니들의 콧대를 눌러주고 자신을 구박해 왔던 노리스 부인이 설설 기게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패니는 현실적인 계산은 접어두고 제 판단을 따른다. 영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영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헨리 크로포드가 유부녀인 마리아 버트럼과 야반도주하는 것으로 그의 실체가 밝혀지고 패니의 선택은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짝사랑한 에드먼드와 가정을 이루고 맨드필드 파크 식구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게 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설을 졸면서 읽지 않는 한, 패니가 호쾌하고 멋진 여주인공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객관성이 마비되지 않는 한, <맨스필드 파크>가 오스틴이 집필한 작품 중 가장 흥미진진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맨스필드 파크>로 제인 오스틴의 진면목을 보았다. 은근함과 진지함, 인간에 대한 통찰과 깊은 지혜. 제인 오스틴은 극적인 사건보다 고요한 일상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제인 오스틴을 썩 좋아하지 않던 나는 그의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최고의 인기작인 <오만과 편견>은 여전히 그저 그랬다. <엠마> 또한 컨트롤 프릭 같은 주인공 때문에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득>은 나를 홀렸다.


<설득>은 과거에 미성숙한 판단으로 멀어졌던 연인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오스틴의 후기작품답게 성숙하고 진지하다. 소설 안에는 애잔함, 현명함, 유머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낭만적이었다.


그때까지 제인 오스틴에게서 낭만을 발견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줄곧 오스틴의 소설을 풍자소설, 리얼리즘 소설로 여겨왔다. 결혼이 삶의 전부였던 19세기 여성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썼을 뿐, 그가 20세기 초 조선의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채만식의 것과 비슷한 작품을 썼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오스틴의 소설이 낭만적이지 않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다아시가 본인의 팸벌리 저택에 버사 메이슨을 숨겨두지 않았고 해서 또, 웬트워스가 앤 앨리엇에게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 상대를 분질러 죽일 것처럼 난리를 피우지 않았다고 해서 <제인 에어>보다 낭만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나는 오스틴의 낭만을 이해할 수 있다. 리지의 여동생을 찾아온 지역을 이 잡듯이 뒤져 베넷가의 평판을 지켜주었던 다아시의 노력에서, 오래전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앤에게 또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웬트워스의 편지에서, 노쇠한 아버지를 떠나길 망설이는 엠마를 위해 처가살이를 결심한 나이틀리의 배려에서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느꼈다.


오스틴의 사랑에 ‘뜨거움’이나 ‘격렬함’과 같은 수식어는 적당하지 않다. ‘인내’와 ‘양보’, ‘조화’, ‘존경’과 같은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는 현실과 융화될 수 있는 편안한 특성들이다. 그리고 결혼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방식이다.


만일 소설과 결혼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스물 한 살에 <제인 에어>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웨딩마치를 올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서로 머리털을 쥐어뜯어가며 싸워대다 일 년 만에 피골이 상접해 이혼서류를 접수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동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달콤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연애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른 살쯤 되었을 때, 연애 중이던 <인간실격>씨가 다른 여자와 동반자살을 했다는 소식에 충격으로 피폐해져 있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지인이 오스틴의 소설을 소개해주었을 것이다. 정신 차리고 좀 제대로 된 소설과 연애를 해보라면서 말이다.


오스틴의 소설은 어떤 연인일까? 쉽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도 않고, 사탕발림 같은 건 모르는 밥통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리통으로 널브러져 있을 때 약과 죽을 싸들고 와 돌봐주고, 내가 식사를 만들어주면 설거지는 반드시 본인이 하는 연인일 것이다. 내가 어딜 가든 나를 데려다주고 데려올 것이고, 아주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줄 것이다.


오스틴의 소설과 연애를 하는 동안 나는 ‘크게 재미가 있지는 않지만 왠지 함께 있으면 편안해’라고 생각할 것이고, 3년쯤 안정적으로 연애를 하다가 두 번째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혼은 처음과는 달리 평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인 에어>식의 로맨스와 오스틴 식 로맨스. 어느 쪽이 진정한 로맨스인지 판단하려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시기마다 할 수 있는 사랑, 어울리는 사랑이 다르니까. 지금의 나는 오스틴 식 로맨스가 더 좋다. 이건 내가 현명해졌다는 증거일까, 나이 들었다는 증거일까? 전자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의 주문은 알지 못하고, 20대 시절로 돌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