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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신원 미상 마리오네트

그림 : Dottie Kim 글 : Mama Lee

by kimleekim Mar 21. 2025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나의 의지” 따위는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내뱉은 울음소리 정도가 나의 의지였을까.

누군가 조정하는 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팔, 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다. 

의지 없이 놓여 있는 나는 누구일까.


브런치 글 이미지 1


사람들은 뭐가 즐거운지 매일매일 구름처럼 몰려와서 인형극을 보고, 박수를 친다.

이야기는 매번 달라지고, 관통하는 주제도 희미하고, 단호히 부르짖는 대단한 의미도 없는데도, 사람들이 오고, 공연이 강요된다. 


마리오네트의 팔과 다리에 묵인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마리오네트는 무대에 던져진다. 


콜로세움처럼 360도 무대에는 숨을 공간이 전혀 없다.

그나마 단정하게 정리된 앞모습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뒤죽박죽 무거운 뒷모습마저도 모두에게 노출된다. 

공연이 시작되고 손과 팔, 다리와 몸통이 춤을 추듯 움직이며, 무대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닌다. 

누군가는 감탄하고, 누군가는 박장대소하고, 누군가는 조롱하고, 누군가는 슬피 운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잡은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가늘고 길고, 쭉 뻗은 대나무 같은 손가락 마디만이 언뜻 보인다. 그나마도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실체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은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줄이 꼬이지 않도록 하고, 마리오네트의 팔과 다리를 분리한다. 


무대로 던져졌을 때 느꼈던 걱정과 두려움, 약간의 수치심과 억울한 마음은 간직할 사이도 없이, 마리오네트는 무대를 내달린다. 체조 선수처럼 빈 곳이 한구석도 없도록 사방을 누빈다. 

마리오네트들은 좌로 우로 흐느적거리며 걷고, 서로 껴안듯이 교차하다, 각자의 방향으로 등 대고 서기도 한다. 

무엇을 하는 건지,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지만 편히 숨 실시간도 없이 휘몰아치는 대로 움직인다. 아니 “움직임을 당한다” 

관절에 줄이 달린 마리오네트는 제3의 힘으로 움직이고, 이름도, 성별도, 캐릭터도 없이 그저 무대에 올려졌을 뿐이다. 

통제당하는 팔과 다리에는 엄청난 압력으로 혈관과 신경 줄기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고통의 괴력은 점점 배가 돼서, 마리오네트를 폭발시킬 것만 같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이 괴로울 지경이 되면, 검은 손가락의 움직임은 클라이맥스를 지난 것인지, 현란한 손놀림을 갑자기 멈춰 버리고, 마리오네트는 풀썩 주저앉는다. 

그 순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은 갑자기 하나가 되어,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친다. 


그 박수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가락에 향하는 것인지, 볼품없이 다리를 뻗고 주저 않은 마리오네트를 향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관객의 박수가 마리오네트를 향한 것일지라도 마리오네트는 느낄 수가 없다.

움직임을 당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리오네트에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표현할 눈, 코, 입, 귀가 없다. 끌려다니는 마리오네트에는 상대가 나를 인식하도록 할 어떠한 감각의 기관도 없다. 


그저 하루의 고통이 끝난 것에 감사하며, 잠시 무대 밖에 주저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일 또 공연이 시작되겠지만, 마리오네트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만 같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아이는 얼굴 없는, 누구인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너무나 피곤해 보이는 마리오네트를 그렸다. 

아이의 신원 미상 마리오네트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쁘게 몰아 쉬는 숨소리와 고통의 비명이 들린다. 

그리고 그림 위로 방황하는 아이의 얼굴과 헤매는 나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림에 속삭여 본다. 

“괜찮아. 이제 줄을 끊고 일어나서 네 무대를 찾을 거야. 그때가 되면 너에게도 눈, 코, 입, 귀가 그려질 거고, 웃음, 피곤, 분노, 기쁨, 환호 모든 감정을 네 의지대로 표현하게 될 거야. 그때는 신원 미상이 아니라. 이름을 가지게 될 거고, 더는 마리오네트가 아니라, 너 자신이 주인공이 될 거야. 그리고 검은 손가락 따위는 잊어버리게 될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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