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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내가 꼭 뭔가 되어야 해요?

그림 : Dottie Kim 글 : Mama Lee

by kimleekim

아이는 호기심과 불안함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꼭 뭔가 되어야 해요?”

엄마의 과다한 칭찬과 과다한 애정이 동기 부여가 아니라 무거운 부담이 된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놀라며, 빠르게 답변했다.

“아니야. 뭔가 될 필요 없어. 너는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딸이란다.”


유치원에 간 아이는 배우는 것이 많아졌다.

자음과 모음을 그림처럼 그리더니, 한글을 띄엄띄엄 읽게 되었고, 자그마한 손을 접었다 펼치며 숫자를 배웠다.

어느 날은 유치원 마당에 떨어진 나뭇잎을 붙이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국어, 산수, 과학과 같은 학구적인 단어를 말하게 되었다.


아이가 “가아~ 나아~ 다아~” 모음을 길게 발음하며 글씨 연습을 하면

“우리 딸 글씨 너무 예쁘게 잘 쓰네. 서예가가 되려나” 했다.

아이가 그림책을 들고 와서 글씨를 읽는 것인지, 외운 것인지 100% 확신할 수 없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면 “우리 딸 대단하다. 발음이 아주 정확하네. 아나운서가 되려나” 했다.

아이가 스케치북과 마룻바닥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면 “우리 딸 너무 멋지다. 색도 이쁘고, 그림도 너무 멋지네. 화가가 되려나” 했다.

유치원생 아이는 엄마의 칭찬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처럼 어깨를 쫙 펴고 자랑스러워했다.

엄마는 아이에게는 무조건 칭찬해 가면서 키우는 것이 맞다고 확신하며,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있다고 뿌듯해했다.

아이는 묻는다 “엄마, 내가 꼭 뭔가 되어야 해요?”

나는 답한다. “너는 존재 자체가 축복인 아이야. 뭐가 되지 않아도 돼”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하루하루 깜짝 놀랄 만큼 재능이 발달하였다.

배우는 과목이 많아졌고, 친구, 우정, 장래 희망과 같은 근사한 단어를 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이는 하얀 가운을 입고, 비커를 들고 실험 중인 사람의 그림을 들고 왔다. 아이의 장래 희망인 과학자를 그린 그림인데, 엄마가 좋아하는 꾸이 꾸이 과자가 열리는 나무를 만들어서 주겠다고 했다.

슈퍼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편안하게 똑똑 따먹으면 되니까. 나뭇잎 모양의 과자를 보고 생각한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준 마음이 너무 기특해서 “우리 딸 너무 훌륭하다. 박사님 되겠네.” 했다.

동네 친구 4명이 한 조로 수영장에 다녔는데, 물장구를 치다가 자유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 딸은 수영도 잘하네. 여자 박태환 되겠어” 했다.

방과 후 수업으로 우쿨렐레를 배운 아이는 집에 와서 한음 한음 정성껏 연주했다. 제목을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연주지만, 고사리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주에 깜짝 놀란 엄마는 “우리 딸 잘하네. 연주가 아주 전문가 수준이야. 얼마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렇게 잘해. 음악 천재인가 봐. 첼리스트가 되려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나” 하며 기뻐했다.

아이의 성장이 신기하고, 팩트에 기반한 구체적인 칭찬으로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있다는 것에 한껏 자만심이 부풀어 오르던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내가 꼭 뭔가 되어야 해요?”

흔들리는 커다란 아이의 눈동자는 마치 “뭔가 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 건가요?” 하고 묻는 듯했다.

당황한 기색 없이. “아니야. 엄마 딸로 충분하지. 꼭 뭐가 될 필요는 없어. 엄마는 우리 딸이 뭘 좋아하는지 찾아주고, 좋아하는 거 더 잘하게 해 주려는 것뿐이야. 이미 충분해. 존재로 충분한데 굳이 뭐가 되지 않아도 돼.” 하고 씩씩하게 답하고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엄마의 칭찬은 때론 한입 베어 먹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계속 먹다가는 충치가 생기는 달콤한 과자가 되기도 하나 보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 없는 칭찬, 솜사탕처럼 마음을 부풀려서 하늘로 둥둥 떠올라가는 기분만 들게 하는 칭찬은 어떻게 하는 것 일지, 쿨 한 칭찬을 하는 법은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칭찬을 하되, 결과점을 정한 칭찬 말고, 과정의 행동과 감정을 칭찬하자는 다짐 했었다.


중학생이 되자 공주처럼 귀엽고 예쁜 리본 핀을 꽂고 학교에 가던 아이는 머리를 쇼트커트로 자르고, 교복도 치마는 입지도 않고 바지를 입거나,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였다.

걸음도 들썩 거리고, 어깨도 흔들리고, 불량 학생처럼 변하는 아이를 보니 걱정을 넘어, 차곡차곡 화가 났다. 몇 번을 참고 참다가 마침내 한마디 하려고 아이를 잡아 앉히고 잔소리를 퍼붓다가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버렸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니”

아이의 눈빛이 묻는다 “엄마 내가 꼭 뭔가 되어야 해요?”

훈육으로 얻을 깨달음도, 엄마의 권위도 없이, “아무리 사춘기라도 너무 과하면 안 돼”하고 얼버무리며 맥락 없는 잔소리를 서둘러 마친다.


엄마는 오랫동안 거짓을 속삭였던 사기꾼 사랑을 저버린 배신자가 된 것 같이 부끄러워졌다.

점수로 아이를 평가하지 않고, 사랑과 칭찬과 격려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좌표를 정확하게 입력했고, 내비게이션처럼 실시간 혼잡한 길을 피해 빠르고 편안한 길로 안내해 주었는데, 여긴 어디인지, 어디로 가는지 방향과 방법 모두가 틀린 것만 같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분명한 사실로 아이가 아닌 엄마의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가 뭔가 되는 걸 엄마가 정할 수는 없어. 아이는 뭔가 될 거야.

그러니 존재 자체로 충분했던 마음 그대로 사랑하자”

그리고 엄마의 마음에 되묻는다. “아이가 꼭 뭔가 되어야 하니? 아이가 꼭 뭔가 되어야 사랑해 줄 거니?

그게 엄마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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