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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미 Nov 05. 2024

수영 강습레인 초고속 승진

..지느러미는 없어요



이 글은 브런치 작가 지원 시에 제출했던 초고를 퇴고한 글입니다.
연재 중인 브런치북의 세 번째 목차였음을 밝혀둡니다 :D


 “회원님, 오늘은 앞에서 출발하지 말고 맨- 뒤로 가세요.”



강습 회차가 오래된 레인의 회원들은  “아유 오늘도 애기엄마가 먼저 출발해” 라며 늘 나를 선두에 세웠더랬다. 스타트 하나는 내가 바로 에이스라고 정신승리 하던 나날들이었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강사님이 내게 제일 뒤로 가라고 하셨다. 


‘뭐지? 그동안 내가 뭘 잘 못했나?’

다른 회원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곁눈질로 흘끔거렸지만 스승님 말씀은 곧 법인 에프엠이 

이유 따위 물을쏘냐.

물에 젖은 이불솜 목화솜 온갖 솜뭉치는 다 걸치고 있는 기분으로 뒤로 가 출발 준비를 했다.



1등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그랬던가. 레인마다 선두로 출발하는 영자는 본인 외에는 앞에 그 누구도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력으로 물의 저항에 싸워 이겨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속에서의 움직임은 지상에서의 움직임과 다르게 힘을 더 들이게 된다. 거기다 더해 뒤에서 쫓아오는 영자들이 있다는 부담감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물속에서 휘저어 내게 한다. 


앞서 간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



하지만 그날은 꼴찌로 출발하는 바람에  앞에 천군만마와 같은 영자들이 물의 저항을 이겨내주고 있었다. 

내 뒤꿈치를 따라 쫓아오는 이가 없자 비로소 마음이 숨을 쉬었다.

고요한 물속을 유유히 헤집으며 마음의 짐을 덜어내니 그동안 속도전에 급급했던 비루한 내 몸뚱이가 진짜 수영을 해내었다.


물속에서 느끼는 안락함, 아늑함, 편안함. 

물속에 누운 그 순간 침대는 과학이라던 그 브랜드의 광고는 정말이지 틀림이 없었다. 

 

킥, 턴, 터치! 

50m 구간을 돌아 재 출발의 순간을 앞두고, 강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뒤꿈치를 지긋이 붙잡고 속삭여왔다.

“회원님, 옆에 중급반 레인으로 지금 바로 넘어가세요.”

앞서간 영자들이 모두 재 출발 하고 난 뒤, 강사님이 비밀스레 레인 승진 소식을 알려왔다.

 아까는 맨 뒤로 가라며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던 그가, 이제는 내 수영인생을 안내해 주는 나이스한 내비게이션이라도 된 걸까. 이내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맨 뒤에 오던 에이스가 옆 레인으로 승진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 레인의 선배들 중 누군가는 물장난하듯 물을 흩뿌리며 승진을 축하해 주기도 하였고, 누군가는 본인보다 초급반에 늦게 들어온 이가 왜, 어떻게 먼저 중급반으로 가는 거냐며 질투와 시기가 반반 섞인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던 수영장 텃세가 시작될 조짐을 알려왔다. 

그러고 보니 웃지 못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수영장은 들어갈 때 한번 나갈 때 한번, 그러니까 운동 전과 운동 후 각각 한 번씩 샤워를  해야 하는 시스템인데 같은 레인을 썼던 선배들이 샤워기 자리를 맡아놓고는 본인들이 먼저 사용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참을 기다렸다가 후에 사용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빨래금지, 염색금지, 유제품 마사지 금지, 온통 금지타령인 문구가 버젓이- 거울 앞에 붙어 있었지만 그녀들은 청개구리가 되어 금지령이 내려진 것을 기필코 완수해내느라 샤워기 앞을 떠날 줄 몰랐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여초사회에서 살아남기, 고인 물의 텃세에 대처하는 처세술 따위의 것들을 검색해 보았다. 유치함 한 스푼을 더한 열정적인 그녀들의 반응에 힘입어 내가 더 잘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고, 정말 그렇게 해내면 그만인 일이었다. 이게 뭐 그렇게 까지 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괜스레 억울했던 감정들을 이불킥 한방으로 시원하게 털어내 버리고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말에도 행동에도 온도가 있다는 것을 새삼 벌거벗은 채로 느꼈던 날들이었다. 



“삐-익! 삐-이-이익!!”

강습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 어느 날보다 상쾌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이겠지. 

모두 빠져나간 텅 빈 물에 몸을 맡긴다. 씨익, 웃음이 난다. 

그런데 서서히 수경 안으로 따뜻한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수경이 새는 거였다면 딱 수영장 물만큼만 미지근한 물이 느껴졌어야 할 텐데, 이 물, 어딘가 좀 뜨끈하다. 

나 지금 울고 있나 보다. 

누구도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고 관심 없을 북받치는 감정은 뜨끈한 눈물이 되어 수경을 채웠다. 


초급반 강습 2개월 차, 텁텁한 락스물에서 이토록 강력한 도파민이 생성될 줄이야.


“이봐, 아들들아, 남편아. 보고 있나? 나도 뭔가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말이라고!!!







*사진출처: DominiqueVince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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