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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Feb 27. 2024

가치와 덕목의 오류

<깊이에의 강요>, 파크리트 쥐스킨트

파크리트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의 내용-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니, 언젠가 해당 소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시는 분들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책 <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파크리트 쥐스킨트)는 내가 태어나 두번째로 가처분소득(용돈)으로 직접 구입한 책이다. 이십년 전 서점을 구경하던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팔천원 뿐이었으나 이 얇은 단편모음집은 육천오백원밖에 하지 않았다는 경제적 현실이 구매결정에 가장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그 외에도, 한창 인기였던 <향수>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처음 눈길을 끌었고, '깊이'가 어디에선가는 강요되는 덕목일 수도 있다는 점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시절부터 '깊이'에 이끌리던 나의 본성에 반해, 내가 속해 있던 사회에서 '깊이'란, 따분하고 분위기를 무겁게 할 뿐 아니라, 실체가 없는 허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은 주인공 화가의 작품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비평으로 시작된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평론가의 '깊이가 없다'는 비평은 곧 집단의 의견이 되고, 마침내 화가 본인의 의견이 되고 만다. 끝내 그 평가를 극복하지(깊이 없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화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소설은 예의 평론가의 단평으로 끝을 맺는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깊이'를 보는 눈과 말하는 입


화가의 자살 후 평론가의 단평에서 묘사된 작품은 충격적이리만치 '분열'을 내보이며, 집요하리만치 '파고들고', 지극히 '감정적이며', '피조물의 반항'까지도 담고 있다. 숙명적이다 못해 무자비하기까지 한 '깊이에의 강요'가 엿보인다. 분열, 파고드는 감정적인 피조물의 반항과 숙명을 넘어 무자비한 강요. 그렇게까지 강렬한 예술작품이 애초에 '깊이'를 결여할 수 있었을까?


평론가는 화가(자살을 감행할만큼 마음의 병을 '깊이' 앓은 예술가)의 작품이 '다시 보니 깊이가 있더라'며 과거 본인의 비평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깊이에의 강요'가, 자기파괴의 씨앗이 외부에서 날아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술가에게 내재되어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는 편이 더 쉬웠을테지.



진심에 집착하는 인간


나 역시 습관적으로 나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덕목이 있다. 진심 내지는 진정성이다. 물론, 평론가와 같은 발언권을 갖지 못한 자로서, 내 '강요'의 방식은 개인적 생활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간의 자기검열과 가끔씩 드러나는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ressiveness)의 수준이랄까. 사소한 관심이나 친절도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되어야만 하니 자연히 관계맺기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고, 누군가 호의를 보여주더라도 그로부터 진심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저 공허하게 받아들여진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서 조용히 차단을 하기도 한다. 또, 갑옷 입고 무장한 사람 앞에서 나 혼자만 비키니 차림으로 배영을 하고 있었다는 한심한 느낌이 들 때면, 물 속 더 깊은 곳으로 숨어 잠영을 하는 일도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관성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애시당초 '진심'은 절대적인 덕목이 아니잖은가. 절대적인 덕목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언제 어디서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가치/정의'에 대한 헛된 믿음이야말로, 기준에 어긋나는 존재들을 쉽게 타자화하는 오류를 일으킨다. 콧속에서 흘러나온 콧물처럼, 철저히 타자화된 타인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물며 내가 완벽한 '진심 감식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나,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노래 가사 (<타타타>, 김국환)처럼, 타인의 진심을 객관적 사실로서 정확히 알아챈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일까. 사실은 나조차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걸.



그러니, 어찌됐건 강요는 맙시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웬만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평가하고 싶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움찔거리고 꿈틀대는 것이 느껴질때면, 마음 속 평론가를 향해 노래를 한 곡조 뽑아보자.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
그건 니 생각이고 -
니 생각이고,
니 생각이고 -!

                                           

- <그건 니 생각이고>, 장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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