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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Apr 04. 2024

굿바이가 아니고 헬로우였네

<슬픔이여 안녕> - 프랑수아즈 사강

[책을 읽으실 분이 결말까지 내용을 오롯이 즐기셨으면 해서 가능한 줄거리를 배제하고 쓴 글입니다. 짧지만 스토리가 흥미롭거든요. 그래서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조금은 몰입이 어려우실 수 있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굿바이인줄 알았는데 헬로우였다

굿바이가 아니었구나. 책 표지의 <Bonjour Tristesse>라는 원어 제목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여"에서, 이제 막 만난 이를 맞이하기보다는 떠나가는 이를 보내는 회한섞인 모습을 연상했었는데. 


어쩌면 한국어 제목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세실과 작가 사강의 집필 당시 나이가 만 열일곱이다. 50년대 프랑스의 문화적 배경과 집안 분위기 덕에 제약 없이 흡연과 음주를 마음껏 즐기지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을 나이다. 세실에게는 슬픔이란 게, 사과를 부사만 먹다가 홍로도 먹어본 기분이었을지도. 하지만 열일곱의 두 배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된 나에게 슬픔을 향한 인사를 건네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여~ 왔는가" 보다는 "가시게,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말자구" 정도가 떠오른다.  


세실은 슬픔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낭만소녀라기보다는 냉소녀인 세실

숱하게 들어보았던 책 제목과 작가의 이름. 이제서야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책이 내 취향보다는 훨씬 낭만적인 감성에 치우쳐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슬픔이여”, 제목이 한 몫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장면과 심리묘사에서 느껴지는 미학적 즐거움보다도, 관조적인 통찰과 가감없이 툭툭 내뱉는 듯한 문장이 주는 해학적 재미가 더 컸다. 


화자가 세실이므로 세실의 눈으로 (세실 본인을 포함한) 인물들을 좇게 된다. 세실은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한편으로, 영민하고 사변적이기까지 한 행위자이자 관찰자, 서술자이다. 15년을 자유로운 홀아비로 산 아빠 레몽. 세실 본인의 또래까지는 아니지만 아빠 또래도 아닌 아빠의 여자친구 엘자. 죽은 엄마의 친구 . 휴가지에서 만난 법대생 청년 시릴. 세실은 본인을 비롯한 주요 인물간의 관계를, 연극 보듯 한낱 외부인처럼 구경하다가도, 관계 다이나믹이 본인의 안락한 삶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조율과 통제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에는 우스운 장면들이 꽤 있다. 모두 애욕과 열망, 행복과 만족감, 좌절이나 배신감 등에 푹 젖어 있는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에 반해, 그러한 장면을 서술하는 세실의 시각은 건조함을 유지했기 때문에 한층 익살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세실의 위악 때문에 그녀를 미워하려다가도, 주변인들(특히 안)의 나약함과 배려를 알아채는 민감성에 호감을 갖게 되어버렸다.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쳤더라도, 본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일부라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내 판단기준으로는 단호히 아니오, 인데도 불구하고, 소설 속 세실의 서사를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그녀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나는 그가 내게 준 쾌락을 사랑했을 뿐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소설 말미에서 세실은 지나간 연인을 되돌아보며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독서모임의 한 분은, 이 부분을 사랑의 일시성, 그러니까 당시에는 온전할지라도 지나간 뒤에는 더 이상 성질을 유지할 수 없는 특성을 느낀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당장 서로 원하는 것만을 취하며 맺는 관계는 사랑이라는 (진부하기는 하지만 거대한) 이름을 뒤집어 쓰기에 걸맞지 않다. 물론 쾌락 또한 어지러울 만큼 아름다울 수야 있지만, 찬란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데가 있는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며 함께하겠다는 다짐, 그러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을 직시하는 희생, 나아가 언젠가는 상대를 잃게 될 지 모르고 그때 나의 일부를 덩달아 잃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온전히 관계에 임하겠다는 결의… 슬픔을 겪기도 하고 더 큰 슬픔을 예상하면서도 나를 내어주는 것. 맞닥뜨리는 순간에는 솔직히 좀 피하고 싶지만, 지나보면 경험을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주었던 선택들이 모여서야 비로소 형체를 갖추는 것이 사랑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세실이 상실하고 애도한 것은 그저 한 사람이 아니라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아빠 레몽이 세실을 아꼈던 것은 분명하지만, 레몽의 애정을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한국식 부정과 모정을 받으며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레몽에게서는 상대가 진정으로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를 위하는 방법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고민하는 마음이 보여지지 않는다. 특히, 유일한 법적 보호자로서, 기숙학교에서 막 나온 딸 세실(당시 15세)을 완전한 성인으로 대했을 때, 세실이 느낀 것은 해방감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은 조금 불안하지 않았을까? 아빠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한다면, 아직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이라는 것을, 즉 내가 (아빠가 원하는/전제하는) 성숙한 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게 한다면 지금처럼 아빠와 일상을 공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다시금 냉소적이지만 재치있는 소녀 세실(그리고 어쩌면 자전적 소설의 저자 사강)이 사랑스럽고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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