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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이 어디신가?

<집수리 마음수리>

by 세공업자

다른 지역에서 활동 중인 사장님이 전화를 해왔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이 끝나지 않아 자신이 못 가는 일을 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고 마침 스케줄이 비는 시간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수락이 아니라 일정이 비는 터라 "감사히 받았다"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항목은 낡은 욕실 콘센트교체와 양변기 밑을 고정하고 있는 백시멘트 재시공이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현관 자동센서 등이 작동을 안 하는데 같이 교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늦은 오후시간 의뢰인의 집으로 출발하였다.


의뢰인의 집은 빌라단지 1층이었고 주차장엔 이미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빈틈을 찾아 겨우겨우 주차를 하고 짐을 챙겨 공동현관문 앞에 섰다. 키패드를 터치해서 세대를 호출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공동현관문이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어 세대를 호출하고 허락을 받기 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의뢰인은 젊은 남자분이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피곤해 보였다. 아마도 야간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작업할 욕실과 센서등을 확인하고 나서 피곤해 보이니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으면 작업을 끝내고 호출하겠다고 했다. 집안엔 연세가 많아 보이시는 어머님이 계셨다. 외부에서 낯선 사람이 와서 좀 불편하셨는지 주방 일을 하시면서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셨다. 레인지에서는 큰 냄비에 무엇인가 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준비에 한창이신 것으로 보였다.

먼저 욕실의 낡은 방수콘센트를 갈고 이번엔 천장에 달려있는 현관센서등을 갈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작업용 3단 사다리를 안 가지고 들어왔다. 주방 일을 보시던 어머님께 의자를 쓸 수 있겠냐고 여쭤보니 의자는 없다며 집안일을 하실 때 쓰는 보통의자 높이의 반쯤 되는 플라스틱 보조의자를 가져다주셨다. 전등을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장에 달려있는 전등을 제거하고 전등을 고정할 수 있는 브라켓을 제거하고 새로 달아야 한다. 플라스틱의자의 높이가 낮아 끙끙거리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주변을 맴도시던 어머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한전에서 나오셨우?”

“아닙니다. 개인업자예요”
“아~ 우리 친척동생도 한전에 오래 다니다가 개인사업을 하더라구.”
“아 그러셨어요.”


전기에 관련된 일들은 자격을 갖춘 업자들이 해야 한다. 그런 업자들이 일반가정집에 전등을 갈아주러 오지는 않는다.


“이 등도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나갔어.”

“얼마나 되셨는데요?”
“응, 얼마 안 됐어. 이 집살 때 있었던 거니까 10년 좀 넘었지”
요즘 백열등을 쓰는 집은 흔치 않다.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등이었지만 어머님의 세월엔 잠깐인 듯 느껴지신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집에 대한 애착이 많으신 것으로 보이셨다.


“어디서 오셨우?”
“영통에서 왔습니다. 집이 그 근처예요.”

“아! 나는 영통롯데마트에서 10여 년을 일했어.”

“그러셨어요! 저도 거기 자주 갑니다.”

“그런데 짤렸지 뭐야, 갑자기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라는 거야”

“아니, 그런 나쁜 사람들이 있었어요?”


좀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맴도시던 어머님이 말문이 열리셨는지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셨다. 어머님은 영통롯데마트에서 일하실 때가 제일 행복하셨던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게 좋았고 특히 같은 안 씨 성을 가진 나이 어린 관리자가 언니 언니하며 잘 챙겨주셨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정든 직장을 그만두게 되셨을 때 큰 충격을 받으신 듯하셨다.


“아, 저도 안 씨예요.”

“그래요? 여기서 흔하지 않은 안 씨를 만나다니 반갑네. 본관이 어디신가?”
“순흥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달라져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마트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고 설명드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다. 하지만 나도 마트에 가면 무인계산대에서 계산을 한다.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응 우리 단지에도 롯데마트차가 배달을 와. 내가 어디서 왔냐고 하니까 영통에서 왔다고 해”

어머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신 듯 말씀이 없으시다

“그러고 보니 배달일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아!” 하신다.


어머님은 롯데마트를 그만두시고도 다른 곳으로 지금까지도 일을 나가신다고 하셨다. 작은 아파트단지에 청소 일을 하시는데 단지가 작다 보니 하루 종일 혼자 일을 하신다고 하셨다. 지금도 직장까지 한 시간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하신다고 하셨다. 또 영통롯데마트에서 여럿이서 함께 일할 때가 좋으셨다고 하신다.

전등을 갈고 변기 밑에 백시멘트를 두를 때도 어머님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으셨다. 금방 끝나야 할 일이 자꾸 길어진다. 만지고 만지다 다시 하기를 반복하자 어머님이 그만하라고 하신다. 나는 변기 밑 백시멘트를 다듬으며.


“여기가 이렇게 이쁘게 나와야 하는데 오늘 잘 안 되네요”

"괜찮아 그만해도 돼"


일을 끝내고 안**이라고 인쇄된 명함을 한 장 드렸다. 앞으로 연락할 일은 없으시겠지만 말이다.


일을 마치니 어머님은 비타민이 들어간 음료를 두 개 주신다. 하나만 주셔도 된다며 하나만 받겠다고 사양해도 이것밖에 줄게 없다며 두 개 다 가져가시라고 하신다. 또 빠트린 물건 없는지 잘 확인하고 가라고 챙기신다. 어머님은 물건들을 들어다 주겠다며 현관을 나와 공동현관문 앞까지 배웅해 주신다. 공동현관문이 열리니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어머님께 바람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올라 어머님이 주신 비타민음료 중 하나를 땄다. 한 모금을 마셨다.

유독 달고 맛났다.

한 병은 주머니에 꼭꼭 넣었다가 아내에게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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