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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어디 있어

<집수리 마음수리>

by 세공업자

“저기, 이사하느냐 며칠간 빨래를 못했어요!”
“아! 네. 그러셨군요. 많이 불편하시겠어요.”
“네 세탁기 수도꼭지가 망가져서요. 빨리 좀 와주세요. 와이프가 뭐라 하고 난리입니다.”

"제가 예약이 있어서 지금 바로 갈 수는 없고요. 끝내고 바로 방문드리겠습니다."
“물만 나오게 해 주면 됩니다. 부탁합니다.”


중저음의 남성목소리는 성우 못지않게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이사를 하고 이틀이 지났는데도 세탁실에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와 빨래를 못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조치해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고 와이프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이 없어 한가한 날도 있지만 갑자기 급하다는 의뢰가 몰리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오전일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아내와 동행했고 일이 끝난 후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하려다 갑자기 세 건이 몰렸다. 모두 가까운 주변이라 신속하게 움직이면 아내와 둘이서 무난하게 조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여유 있게 식사를 하다가는 늦어질까 싶어 우리는 평소 먹지 않는 버거왕 세트를 구입해서 차 안에서 먹는 중이었다. 노동 후의 식사는 좋아하지 않는 버거도 꿀맛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다음 의뢰인의 집에 들러 수리를 마치고 중저음의 의뢰인 집으로 향했다


현관 초인종을 누르니 연세가 지긋하신 남성분이 문이 열어주셨다. 남성분은 체격이 좋으셨고 까만 피부가 한눈에 보아도 노가다 십장(현장관리자) 같은 분위기가 나셨다. 집에 들어서니 짐정리가 한창이셨다. 헌 문짝 하나가 거실에 눕혀진 채 놓여있었고 전동드릴과 공구함, 부품 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설전문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나를 부른 게 맞나! 속마음이 속삭였다.)


세탁실을 확인해 보고 깜짝 놀랐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규격의 수도꼭지가 달려있었다. 보통세탁실에는 15A(외경 20.9mm)의 일반수도꼭지를 사용하는데 이곳은 요즘 보기 힘든 20A(외경 26.25mm)의 큰 수도꼭지가 달려있었다. 수도꼭지는 잠긴 채 열리지 않아 수돗물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가지고 온 15A 수도꼭지를 설치하려면 20A를 15A로 변환시켜 주는 동으로 된 부품인 서비스닛블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급하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철물점을 찾았다. 1.8km 떨어진 제법 큰 철물점이 있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둘러 나선 길은, 퇴근시간이 임박해서인지 막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인근에 큰 철물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철물점 안에 들어서니 제법 큰 내부엔 진열대마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물건들이 가득했다. 나는 경험이 많아 보이시는 사장님께 큰 수도꼭지를 달라고 했다.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어. 잘못 보신 게 아냐?”
“아닙니다. 15 말고 20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연결 서비스닛블 하나 주세요.”
“그런 거는 공장에서나 쓰지. 아파트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15A수도꼭지와 비교해서 찍은 사진을 보여드렸으나 반응이 의외였다.


“풀어는 봤어?”
“아니요, 풀어보지는 않았지만 큰 게 맞아요!”
“풀어는 보고 말을 해야지! 풀어보면 안쪽은 작은 게 나올 거야”


사장님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의 오랜 경험을 과신하듯 풀어보면 안에 분명 작은 배관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는 순간 하수가 되었고 고수인 사장님은 ‘안 봐도 다 안다’는 식으로 무작정이었다.

다시 의뢰인의 집으로 향했다. 해는 저물고 퇴근시간 길은 막히고. 이 찜찜한 느낌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꼭지를 풀어보았다. 큰 규격이 맞았다. 이를 어쩐다! 잘난 척하던 철물점 사장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의뢰인께 죄송하다며 잘 열리는 온수라인에 세탁기 냉수를 연결했다. 보일러 가동만 안 하면 우선은 냉수세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곤 다음 집으로 향했다.

다음집수리를 마치고 차에 오르려는 순간 내일 동료의 일을 도와주기로 한 일정이 생각이 났다. 서둘러 중저음목소리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일정을 생각 못해서 내일은 수리가 어려우니 급하시면 다른 분에게 의뢰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이거 하기 어려워서 피하시는 거 같은 데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아닙니다. 급하시면 그렇게 하시고 괜찮으시면 모레 아침 제일 먼저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그렇게 해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겠다.’는 말이 강하게 여운을 남겼다.


이틀 후 아침 가까운 집 앞 오래된 철물점을 놔두고 좀 더 떨어진 철물점에 들렀다. 집 앞 철물점은 시세에 2배, 어떤 것은 4배까지도 받는 물품들이 있었고 또 불친절하기까지 해서다. 좀 더 떨어진 철물점에서 부품을 구입하고자 했으나 찾는 사람이 없어 재고가 없다고 한다. 그때 알았다. 엊그제 갔었던 철물점에서도 그 부품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으면 없다고 할 것이지! 우기기는!(속마음이 속삭였다.)

집 앞 철물점에 들렀다. 부품이 있었다. 무뚝뚝한 사장님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때가 다 있다니!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고가의 귀한 부품을 두 개나 사서 속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의뢰인의 집에 방문하여 수도꼭지를 달아드리곤 벽면을 마감하는 왕의 끝이 날카로워 “여기에 베이지 않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라며 살짝 만지다 내가 그만 손끝을 베이고 말았다. 금방 빨간 피가 손가락 끝에서 떨어졌다. 나는 손끝을 꼭 쥐고 지혈을 했고 의뢰인은 나를 데려다가 거실에 앉혔다. TV장 서랍을 여니 파스, 소화제, 거즈, 소독약 등 상비약품이 가득했다. 의뢰인은 손가락을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뒤 거즈로 감싸고 반창고를 칭칭 감았다. 나는 의료종사자시냐고 물었고 상남자 같은 의뢰인은 중저음으로 수줍게 웃으시며 “상비약품이 이 정도는 있어야죠.” 하신다.

추가로 벽에 액자를 걸 수 있게 콘크리트 벽을 해머드릴로 세 곳을 타공해 드렸다. 화장실문(엊그제 헌 문짝이 떠오름)을 새로 달다 닫히지 않는다고 하셔서 수정해 드렸다. 날카롭게 날이 선 왕에는 베이지 않도록 실리콘으로 안전하게 마감했다. 의뢰인은 처음금액의 2배를 수리비로 주신다. 나는 1.5면 된다고 했고 공구를 정리하여 현관을 나섰다.

“다음에 또 봅시다.” 중저음의 멋진 목소리가 문밖까지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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