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의 아파트는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전면에 비상계단이 있었고 좌측으로 난 방화문을 들어서면 여러 세대가 복도를 따라 나열되어 있었다. 의뢰인의 세대는 복도 끝에 위치해 있었다. 복도 끝엔 새시창이 콘크리트난간 위에 설치되어 있었고 창 윗부분은 뻥 뚫려 있었다. 특정공사 아파트들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브랜드마다 모양과 구조가 다른 특색들이 있었다. 11월 말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진 데다 뻥 뚫린 곳으로 들이치는 바람은 제법 차게 느껴졌다.
현관문이 열리고 세대에 들어섰다. 의뢰인인 여성분은 천장 수동빨래건조대를 구입해서 베란다의 단단한 콘크리트 면을 뚫고 설치할 엄두가 나질 않아 의뢰하셨다. 건조대를 사용하기에 가장 편안한 위치를 의뢰인과 상의하였다. 3단 사다리를 놓고 먼지 받이를 대고 해머드릴로 천장을 타공 했다. 구입해 놓은 스테인리스 건조대를 볕이 잘드는 위치에 설치해 드렸다.
이번엔 예정되어 있던 현관 롤방충망을 설치해 드렸다. 현관방충망도 이사하며 가져오셨다. 현관문과 방충망의 크기를 확인하고 현관문을 닫고 열면서 간섭이 없도록 설치를 하려는데, 현관문이 하단 문틀에 걸려 잘 닫히지를 않는다. 걸리는 부분에서 팔에 힘을 주고 힘껏 당겨야만 닫혔다. 어머님과 같이 사신다고 하시는데 연세 있으신 어머님은 이 문을 잘 닫을 수가 있으실까?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의뢰인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님도 매우 힘들어하신다고 하신다. 이 문을 계속해서 힘껏 잡아당겼다가는 손목이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비용이다. 임대아파트들은 어지간해서는 수리를 해달라고 하기 어렵고 거주인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비용을 들여 고치기 힘들어한다. 나는 현관문을 손봐드려도 되겠냐고 물었고 의뢰인도 좋다고 하신다.
현관문을 여닫으며 원인을 파악해 보았다. 무거운 현관문을 지탱하고 있는 경첩들을 고정하고 있는 나사못들이 헐거워져 있었고 경첩이음사이를 받치고 있던 와셔(엽전처럼 생긴 동그란 부품)들이 닳고 닳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나는 경첩나사못들을 단단하게 조이고 튼튼한 철사로 와셔를 만들었다. 무거운 철문을 작은 지렛대(빠루)로 들어 올려 철사로 만든 와셔를 경첩이음사이에 넣었더니 문이 들어 올려지면서 여유가 생겼다. 경첩 사이사이에 윤활유를 칠하니 문이 순조롭게 닫힌다. 공구들을 정리하여 나오려는데 연세가 많으신 어머님이 외출에서 들어오셨다. 현관문이 부드럽게 닫히니 힘이 들지 않으신다며 좋아하신다.
어머님은 시계를 걸 수 있게 벽에 못을 박아 달라고 하셨다. 인터폰 위에 시계를 다는 것은 인터폰과 비교해서 좌우와 높이가 맞질 않으면 서로 삐딱하여 보기 안 좋기에 정성 들여 중심을 잡아야 한다.
이사를 하고 나서 벽을 뚫고 못을 박아 시계를 거는 것은 마치 무슨 행사라도 되는 듯 이사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정성껏 벽을 뚫고 못을 박아 시계를 거니 이사가 완성되었다.
다음날 점심때쯤 따님이 연락을 해오셨다. 복도에 뚫려있는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어머님이 추울 것 같아 막아줄 수 있겠냐며, 어떻게 좋은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전날 방문했을 때 뚫린 창으로 들이치던 찬바람이 생각났다. 방문하여 뚫린 창 크기를 실측하고 다른 곳은 어떻게 해놓았는지 의뢰인과 같이 둘러보았다. 다른 곳들도 찬바람을 막기 위해 두꺼운 우레탄이나 아크릴, 또는 불투명 방한제로 작업한 곳들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튼튼하게 찬바람을 막을 수 있을까? 지나치게 두껍지도 않고 영하의 기온에 쉽게 경화되어 깨지지 않아야 하며 투명해서 시인성이 좋은 것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 쇼핑몰 여러 곳을 찾다 몇 가지 제품들을 선별하여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중 0.5mm 두께의 적당한 비닐제품이 있어 선정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거기에다가 양면테이프를 구입하고 고정할 수 있는 졸대(비닐과 창들을 고정하는 마감재)를 구입하여 작업을 한다면 견적금액에서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하루라도 빨리 설치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바로 주문을 했다. 물건이 도착하고 바로 설치하러 복도에 도착했다. 찬바람이 들이치며 비닐이 날려 설치가 어려웠지만 미리 재단해 가져왔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서 한창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어머님이 나타나셨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내다보셨다고 하신다. 뚫린 창이 투명하고 튼튼한 비닐로 막아지고 찬바람이 차단되니 벌써부터 훈훈한 분위기가 들었다. 어머님은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집안으로 들어가 창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온다며 다음번에 연락하면 방풍지를 설치해 달라고 하신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며 남겨놓은 재산이 없어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이제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고 여기서 살다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하신다. 작업을 의뢰하신 분은 첫째 따님으로 외국에 계시다 잠깐 들어왔다 다시 나갈 예정이라고 하셨다. 찬바람이 불면 기침이 심해지시는 어머님을 위해 방풍비닐 설치를 의뢰하신 것이다. 어머님은 현재 둘째 따님과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모든 어머님들이 그렇듯 이런저런 자식들 걱정이 많으시다. 나오는 길에도 수고했다며 나에게도 빵을 챙겨주신다.
현관문을 열고나오니 복도 분위기는 처음 방문했을 때 느껴졌던 찬바람이 없어 훈훈했다. 별것 없는 비닐 한 장 차이는 참으로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