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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Nov 12. 2024

폭설이 끝나지 않은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집에 홀로 남아있는 앵무새에게 물을 줘야 한다고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경하는 눈보라를 헤치고 눈숲을 걸어간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숲을 기듯이 걸어갔겠지. 


집은 깊은 숲 중턱에 위치해 있다.  제주에는 폭설이 퍼붓고 있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이미 며칠간 돌봄을 받지 못한 앵무새는 죽는다. 정신이 희미해지도록 움푹 파이는 눈 속을 헤치고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새, 2부는 밤, 3부는 불꽃이다. 1부의 대부분은 앵무새의 이야기이다. 아니, 앵무새를 살리기 위한 설야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이 책에서의 4.3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부는 인선의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제주 4.3 사건의 진상과 트라우마, 트라우마의 유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3부에는 엄마와 인선의 고독과 고통에 짓눌렀던 시간과, 아버지와 외삼촌의 이야기가 마저 나온다.


끝없는 눈의 이야기가 숨 막혔다. 신이 입김을 불어 녹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핏빛의 역사를, 그 바다를 바라보고, 살인의 현장을 도처에 두고 살아가는 피해자의 삶이 명치를 짓눌렀다. 현실과 영혼과 새와 인선의 이야기가 뒤섞여 혼동되는 서술의 방식은 작가 한강이 의도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 무질서함에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과, 고통의 삶과, 풀어내야 할 삶, 사랑의 이야기가 수수께끼 같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작가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닌 내가 이 책에서 무엇을 읽고 있는가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앵무새의 죽음에서 4.3의 죽은 영혼을 보았고 외롭게 신음하는 인선을 보았고 희미한 불빛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경하를 보았다.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인선이 있는 쪽의 어둠을 향해 나는 말했다. 상체를 일으켜 주머니 속 성냥갑을 꺼냈다. 거칠거칠한 마찰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거기 성냥개비를 부딪치자 불티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황 타는 냄새가 번져왔다. 촛농에 잠긴 심지를 꺼내 불꽃을 옮겼지만 곧 꺼졌다. 엄지손톱까지 타들어온 성냥개비를 흔들어 끄자 다시 어둠이 모든 걸 지웠다. 인선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더미 너머에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사라지지 마. P. 324


새의 죽은 얼굴을 다시 감싸 여민다. 좀 전처럼 손수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흰 무명실로 감고 재봉 가위로 자른다.... 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다시 솟아 상처에 엉긴다.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P. 152


양심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의 거리가 아니라 사건 그 자체로 아파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핼러윈이 다시 돌아오면서 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다시 떠오른다. 잊는 일도, 용서하는 일도 피해자들의 아픔이 위로가 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희생자와 피해자는 아직 폭설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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