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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었던

소년이 온다, 한강

by 보나쓰

한강의 책은 한 번 손에 쥐면 놓을 수가 없다.


그녀의 문체는
읽는 이를 올가미처럼 감아 가슴을 잡아챈다.

『소년이 온다』는 달랐다.

나는 읽으면서 몇 번이고 책을 내려놓았다.

눈시울이 붉어져서 놓고,
가슴에 울분이 차올라서 놓고,
숨이 막혀서 놓았다.

1980년 5월 18일.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나.


기억해야 할 잔혹사


역사는 때때로
아주 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날의 희생이 있었기에
내 부모들이 살아남았고,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나의 역사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자국민을 학살한 역사, 5.18.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날이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내가 아는 5.18의 이미지는
곤봉 같은 것을 들고
사람들을 패고 공포를 휘두르는
흑백사진이 전부였다.

끔찍한 학살과 총질.
어린 학생들까지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사실.

하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짓을 당했는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남의 얘기.
가슴 아픈 남의 이야기.

기억해야 하는 잔혹사.


"학살에는 저버린 양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나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 생각이 들자
서러움과 죄책감이 차올랐다.

역사는 그저 지나가지 않는다.
부끄러울수록 드러내야 하고,
두려울수록 파헤쳐야 한다.

위로할 수 없는 혼들에게,
남은 이들의 가슴에,
먹먹한 위로라도 전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해야 한다.


소년이 있었던 곳, 있어서는 안 되는 곳


한강이 소설에 등장시킨 죽은 소년, 정대.
그의 영혼이 떠도는 곳.

그곳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열여섯 살의 정대가,
아니,
그 누구도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곳.

무참히 살해당하고,
붉은 고깃덩이처럼 겹겹이 쌓여
버려진 혼들의 현실.

그 현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눈앞에서 보았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 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P.57)


끝까지 눈을 뜨고 읽었다.


차마 글로 쓰기에도 힘든
처참한 광경들.

읽으면서
상상이 될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읽기를 망설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었다.

우리의 조국이 죽인 소중한 생명들과
그 가족으로부터 무엇이 사라져 갔는가를
이 책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꽃이 핀 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꽃 핀 쪽으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소설 속에서,
소년은 꽃이 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해야 할 죽음이 남아 있고,
지워지지 않은 고통이 남아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눈을 뜨고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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