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한강의 글을 읽다 보면 고통이 느껴진다. 분노와는 다른 차분한 고통이다. 동시에 평안이 느껴진다. 고요의 평안이 아니라 짓누른 평안이다. 한강의 글을 읽다 보면 죽음의 냄새가 난다. 썩어서 더 이상 썩을 것도 없는 저 깊은 아래에 묻혀도 단단히 묻혀 있을 그것을 꺼낸 냄새이다. 동시에 삶의 냄새가 난다. 그 삶에는 사랑이, 인내가 있다.
한강은 지나가는 것이 없어 참 살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시를 읽는다.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자> 중에서
그녀는 해부한다. 갈가리 찢어 나누어 따로 둘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떼어내는 듯하다. 가끔은 그것이 고통스럽다. 그냥 대충 뭉쳐 두면 마음 편할 것을. 굳이 그렇게 보여준다.
그녀는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방법도 모른다. 고스란히 난막까지 뒤집어 드러내고서야 마친다. 그것을 나는 견디면서 시를 읽는다. 그녀가 삶에서 견디는 것은 생명 그 자체와 저항이 아닌가.
움직이려고 몸을 껍데기에서 꺼내며 달팽이가 말했다.
...
찌르지 말아요
짓이기지 말아요
1초 만에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쉬 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조용한 날들 2> 중에서
그래서 인가 나는 그녀가 말하는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가 정말 괜찮다고 들린다.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하다. 글로 표현하는 게 빠르기도 하다. 글로 듣는 게 좋다. 그럼에도 한강의 글은 버겁다. 종종 한강의 글에서 느껴지는 갈퀴 같은 글은 심장을 우빈다. 그럼에도 그 때문에 빠져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