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눈이 멀어가는 남자와 말하지 않는 여자의 감정과 목소리가 오래전에 사어가 되어버린 희랍어로 정교하게 맺어진다. 한 문장이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는 희랍어가 여자의 무언의 언어에 겹쳐진다. 남자는 눈동자와 눈동자가 겹치고 겹쳐 서로가 보이지 않는 즈음까지 다가서야 상대방의 윤곽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실제로 멀리 앉아 있는 여자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을 텐데 마치 동물과 동물이 교감하듯이 여자를 인식한다.
남자는 독일에서 눈이 더 멀어지고 있는 와중에 가족들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익숙하지 않은, 오히려 가족들이 더 필요해질 삶을 살아갈 곳으로 남자는 한국을 선택했다.
여자는 이혼하면서 재판에서 아이를 잃었다. 말하지 않는 여자는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이 소설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따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의 사랑과 과거의 기억과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삶의 이야기와 여자의 어둡고 중요한 것이 소실된 상실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이 소설에서 현실의 시간은 오직 희랍어 시간이다. 여자와 남자가 공존하며 어두워 가는 눈과 소리를 내지 않는 입술이 공기처럼 만나는 시간이다. 여자와 남자가 돌아보는 시간들은 곤궁한 기억의 파편 같다. 이들은 만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감정의 바닥을 기는듯한 여자에게 동정심이 아닌 갈증을 읽었다.
여자와 남자가 맞닺뜨려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건 남자가 새를 구하려다가 사고로 다치고 안경을 깨뜨리게 된 때부터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 낭하에서 난감해진 남자에게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날 남자는 여자와 대화라기보다 독백을 한다. 마치 묵히고 참았던 말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뱉어낸다.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의 통로를 지나간 날들을 되감는다.
둘은 소리의 울림이 하나뿐인 그 대화 끝에 서로를 안는다. 위안이 필요한 서로를 알아보는 건 침묵 속에서도 가능하다. 이 소설에는 외롭고 조용하고 묵직한 침묵이 흐르는 듯하지만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고 아낌과 이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여운을 남긴다.
작가 한강 특유의 우아하고 시적이면서 차가운 칼날 같은 문체가 선명하게 살아있는 책을 찾는다면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