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고 I
8월,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휴가분위기가 들썩일 때쯤 내 아버지의 기일이 있다. 따스한 봄햇살이 잠시 머물다 떠나고 공기가 본격적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늘 마음에 무게추가 달린다. 약간의 우울감과 함께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그리움이 녹지도 않고 해마다 찾아온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십오 년이 되도록 한 번도 다르지 않은 그 마음이 올 해라고 다를까 질문을 한다.
대답이라도 얻은 듯이 나는 오늘 다른 계절을 만났다. 기일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여름이 한껏 닳아 올라 있었다. 아버지를 납골당에 모신 그날처럼. 그 탓인지 내 마음은 더더욱 그날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검은 한복을 입고 있는 여자들과 검은 양복을 까마귀 떼처럼 입고 따르던 남자들의 그림자가 무리 져 걷던, 모든 것이 검고 말라비틀어지던 날이었다. 너무 뜨거운 날이라 아버지의 식은 몸이 더 뜨겁게 태워지던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해 그 열기로 타기만 하던 가슴을 끌어안고 주저앉았었다.
올해 여름은 작년과 또 다르게 무척 매섭게 시작되었다. 마른장마와 지구 온난화 가속화에 더해 북태평양 고기압과 티베트 고기압이 이례적으로 동시에 확장되어 열돔이 만들어지고 뜨거운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 열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에 7월 한 달이 다 가고 8월이 시작되면서 새벽에 드디어 한 줄기 비가 내렸다. 솨 하는 소리를 내며 흠뻑 쏟아진 비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열도 조금 식었다. 납골당에 도착했는데 산 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귓가를 살짝 건드리며 등 뒤에서 수줍은 바람이 다가왔다. 이맘때 느껴지던 뜨겁고 마른 공기가 조금은 수그러진 낯선 계절이 펼쳐져 있었다.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모시던 그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늦게 도착한 동생네와 엄마를 모시고 올라가 간단하게 준비해 온 음식을 상에 올려 제를 지냈다. 향에 불을 붙이고 한 길로 올라오는 첫 연기에 코를 대면서 엄마는 향내가 좋다고 했다. 부드럽고 진한 향내가 빠르게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공기 속으로 퍼졌다. 엄마는 여름마다 제사음식을 하느라 고생이니 이제 그만하고 간단히 치르자고 몇 번을 말해도 입술만 꾹 다물뿐 대꾸조차 안 하시던 분이었다. '올해는 간단히 과일 몇 개와 포만 올리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엄마의 늙음이 서럽게 들렸지만 다행이라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제사상은 언뜻 보면 초라할 정도로 간소화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몇 번에 걸쳐 절을 드리고 삼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음식을 챙겨 일어났다.
제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걸음이 늦은 엄마를 기다리는데, 거뭇한 형체가 휘리릭 날아 지나간다. 그 빠른 날갯짓에 시선이 끌려 보는데 갸름한 제비 한 마리다. 손수건처럼 펼쳐져 가볍게 나르는 제비를 쫓아 얼굴을 돌렸다. 처마 안쪽에 제비집이 보인다. 제비집 끝에 오밀조밀 앉아 있는 것들은 세 마리의 새끼들이었다. 제법 커 보였지만 아직은 날아가기에 어렸는지 어미가 반복해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오면서 새끼들 입에 먹이를 넣어주고 있었다. 제 어미가 날아올 때 마따 입을 좌악 벌려 울면서 보채는 새끼들이 신성하게 느껴졌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이끌려 우리 식구들이 몰려들었다. '저기도 있네.' 둘러보니 건물 네 면의 처마 아래에 제비집들이 몇 개씩 있었다. 이미 비어있는 집들도 있었고 어떤 집에는 네다섯 마리의 새끼들이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터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목부터 명치를 타고 배 깊숙이 전율을 일으켰다. 모시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납골당을 결정한 동생이 못마땅한 적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계신 자리가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전에 없이 안심이 되었다. 죽으면 끝이라고 하지만, 그 그리움은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부터 시작해 사는 내내 가슴속에서 뜨끔거린다. 그 마음을 지헤롭게 흘려보내지 못했던 내게 이제 괜찮다고 등을 쓸어주는 듯한 날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차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흘러내릴 정도는 안되고 가끔씩 와이퍼가 움직여 닦아내는 정도였지만, 오랜만에 식은 열기가 세상을 적시며 숨통을 열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