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었다. 점심으로 야채 비빔밥을 먹고 차가운 손을 꼼지락 거리며 매장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멀리서매장 앞 매대에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아따씨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인사를 하고 싶어 그녀의 뒤통수만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돌아본 아따씨와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아따씨야. 반가워요."
"와~ 뒤에서 살벌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내가살려고 돌아봤네요. 보통 기운이 아니야."
"아이뭘요, 그냥 보통 기운의 연약한 인간입니다."
깜짝 놀래 주는 인사에 실패하고 아따씨와매장으로 들어오는데 그녀의 휑한 목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겨울이면 북극에 사는 사람처럼 온몸을 꽁꽁 싸매고 다닌다. 겨울철 한기를목티와 목도리로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목이 추워 보이면서 궁금해졌다.
"아따씨야! 목이 너무 허전해 보입니다. 안 추워요?"
"몸에 열이 많아서 괜찮아요."
도대체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어떤 느낌인 걸까?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그 느낌에 차가운 한기를 대신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겨울에 목을 휑하니 내고 다니셨는데.'
열이 많은 체질이라 나보다 옷을 적게 입고도 추운 겨울을 보내곤 하셨다. 불편한 마음에 친정에도 가지 않는 내가 아따씨의 휑한 목을 보다 엄마를생각하게되다니 황당했다.
양치를 하는 동안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두 여인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밑에서 일상을 보내며 사셨을 엄마, 매장에 초보처럼 일하며 호랑이 같은 과장 밑에서 일하고 있는 아따씨. 이렇게 따진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아따씨를 엄마같이 편안해한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그녀의 이름 대신 아따씨로 불러대고 쓸데없는 말장난을 걸어댄다.이것저것 챙기면서도 이것저것 따지게 되니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거울 속 내 모습이 서글퍼보였다.
나는 장녀로서 책임감이 강하고믿음직스러운 아이였다. 반듯하고 야무지게 행동해야 했으니 투정도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 부렸어야 할 투정이 마음창고에 버려져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40이 넘은 지금에서야 나오다니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신연령은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 같다. 보호받는 여자아이보다 보호해 주는 남자아이의 씩씩함을 좋아한다. 이것이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투정을 부리지 못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아따씨에게 하는 행동들이 이해되었다.
브런치 작가의 합격메일을 받았을 때였다. 합격된 문자를 보자마자 아따씨에게 달려가 말했다.
"아따씨야 나 브런치작가 됐어요. 합격했어요."
합격소식을 들은 아따씨는 같이 기뻐하며 축하한다고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축하의 의미가 담긴 코코아도 사주었다.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맛있는 걸 얻어먹는 딸의 모습 같이말이다.
따뜻한 마음의 아따씨를 보며 나의 어린 마음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어느새 편안해진 아따씨에게 엄마 같은 편안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마음에 편안해지고 일에 서투른 아따씨에게 지적해야만 하는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이런 나의 생각을 말해주니 아따씨가한마디 한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테니 마음껏 투정을 부리세요. 아리씨!"
아리는 만화 속 아따맘마의 딸이다. 만화 속에 나오는 그들처럼 우리도 닮아가나 보다.
모든 것들이 평화로워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면서 몰랐던 나의 본모습들과 마주하게 된다. 아직도 미숙하고 어리숙한 모습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행복감을 나눌 수 있는 아따씨가 있음에 마음이 포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