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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모 Aug 30. 2023

문어발 경영

나는 계획형 인간이 아니다. 인생은 어차피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001년 5월에 첫애가 태어나 나는 비로소 엄마가 되었다. 아는 지인들이 친정엄마가 멀리 있으면서 혼자 아이를 드다려야 되는 내가 딱했던지, 굵직한 육아도서들을 선물했는데, 미안하게도 열어보지도 않았다. 대학원 수업이 너무 어려워 허덕이고 있는데 육아도서를 펼쳐 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수업 중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불어로 된 문장이 어디서 끝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고, 세미나 식이라 교재는 원래 없고, 노트를 할 수 도 없었다. 학기말 시험도 담당 교수님들과의 토론 방식의 시험이라, 같은 학년 친구들의 필기노트를 빌려 복사를 해서 남편이 읽어 주면, 그것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 (그때 나는 불어 손글씨를 전혀 못 읽는 문맹이었다.) 남편이 출장을 갔을 때는, 남편 바로 아래 동생인 Jean-Louis네 브뤼셀 집까지 가서 읽어달라고 할 정도였다.


다행히 첫딸인 혜린이는 뭐든지 잘 먹는 아주 쉬운 아이였다. 내가 먹는 것을 그냥 조금씩 줘봐서 먹으면 계속 주고 싫다면 다른 것을 줬다.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왔을 때 한된 아기가 김치를 먹는 것을 보고 다른 한국분들이 충격이라고는 하셨다. 이렇게 막 키운 아기지만 지금 이 아이는 스물둘에 어여쁜 분자물리학 대학원생이 돼었는데, 아주 건강하게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국제정치 대학원 석사 논문 디펜스를 2002년 12월 초에 했는데, 둘째의 출산 예정일 2주 전이라 배가 남산만 하게 불렀었고 심사교수님들이 여기서 애 낳을까 걱정되니 앉아서 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석사학위 받고 나서, 박사과정 수업까지 다 마쳐서 박사논문만 쓰면 되는데, 나는 공부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부닥치면서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성격에 맞아, 종종 들어오는 화학, 정밀기계, 의학, 제약, 원자력 등 분야와 한국과 유럽 연합의 행정부처 회의통역을 했다. 때때로 같이 일하던 주재원이 귀국하고 새로운 주재원이 오면, 벨기에 내에서 한국어/불어/영어 공증번역사를 못 찾아 한국에 서류를 몇 번씩 주고받으며 힘들게 서류준비하는 것을 보고, 사법부에 지원을 해 1년여 심사기간을 통과해서 벨기에 공증통번역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 일도 좋지만, 계속 관계를 쌓아가고 정기적인 수입이 되는 일을 찾다가, 유럽 연합 단일시장의 이점을 이용해, 각 유럽연합 회원국마다 두세 개의 총판을 만들어 벨기에 창고에서 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2003년 12월에 한국의 실사소재 제조공장의 유럽 법인을 벨기에에 설립해 법인장을 맡게 되었다.


직장상사가 멀리 있는 것은 직원의 정신건강에 아주 긍정적이다. 일은 많고, 성과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사무실을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믿을 수 있는 놀이방에 아이들을 내려놓고 내 사무 공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2007년에 셋째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낳고 2주 만에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봄방학이라 집에 있던 남편의 큰딸 셀린이 그때 만 열여섯이었는데, 방학 1주일간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 하겠냐고 했더니 돈 버는 게 처음이라고 너무 좋아했다. 갓난아기 수린이와 베이비시터 셀린과 함께 출근을 해서 틈틈이 모유수유를 하고, 2주 동안 밀렸던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니 머릿속으로만 자꾸 쌓이던 일의 무게가 줄어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더랬다.


우리 애들은 나를 문어다리 엄마라고 부른다. 동시다발적으로 쭉 펼쳐놓고 닿는 것마다 잡는 문어와 내가 닮았다고?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시행착오와 성취과정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엄마를 어떤 카테고리로 정의를 해야 할지 정리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2012년에 우리 늦둥이 넷째를 낳았다. 딸 셋에 이제 막내아들을 낳아, 모름지기 만루 홈런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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