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10일 나는 벨기에에 도착했다. 지난 9월에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이다. 내가 여기 정착하기로 한 이상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현지 언어다. 이 사람이 내게 “by the way, we speak French in our town”이라고 했을 때, 뭐 별 대수롭지 않게 “Ah, OK!”라고 대답할 만큼 나는 “무식해서 용감한” 사람이다.
공항에서 짐 찾자마자 야밤에 브뤼셀 광장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전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오더를 받는 직원이, 테이블마다 온 손님에 맞춰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오더를 받는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저런 고인력이 고작 아이스크림 오더를 받는다니. 오더 언어의 패턴이 정해저 있을 테니 반복하면 충분히 섭렵할 수 있기는 하겠다 하고 이해도 되지만, 버튼을 누르면 바로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 몇 가지의 외국어는 벨기에에서의 내 삶이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에게 제일 먼저 불어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본마마 (Bonne maman)였다. 본마마는 할머니를 부르는 애칭으로, 직역하면 "좋은 엄마"라는 뜻이고 손주들이 시어머니를 이렇게 부른다. 이 사람의 엄마는 벨기에 브뤼셀 광장 근처에 생선 요리로 아주 유명했던 고급 음식점의 요리사의 딸이었고, 브뤼셀에서 Braine-le-compte의 Salmonssa 성으로 음식점을 이전했을 때 온 가족이 성으로 이사를 했다.
Salmonsa 성 바로 옆에 들판 너머에 있는 농장이 바로 Ferme de la tour, Louis Vincart 이 사람의 아빠네 가족의 농장이다. 요리사의 딸과 농장 지주의 아들은 중간지점인 들판 한가운데에서 만났고, 결혼하고 네 아이를 낳고, 이후에 이들이 만났던 들판 한가운데 집을 지어서 이들의 아이들과 그 손주들과 살고 있는데 그 집이 지금 내가 와 있는 이 집이다.
본마마는 나를 완전 아기 수준으로 대했다. 말이 안 통하니 표정을 보고, 배고픈 것 같으면 먹을 것을 주고, 심심한가 싶으면 자신이 뜨개질을 시작을 해서 계속해보라고 내게 건네거나, 농장에 있는 양들한테 마른 빵을 갖다 주는 것들을 시켰다. 본마마가 하는 불어는 아주 짧고 쉽다. 딱 내 수준이다. 이 사람이 회사에 출근해서 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했기 때문에 본마마와 있는 시간이 많았고, 나는 본마마를 이 사람이 부르는 것과 똑같이 엄마 (Maman)라고 불렀다.
며칠 지내면서 농장일과 집안일을 거들었는데, 토요일에 이 사람의 한 살 아래 동생 Jean-Louis가 그의 아내 Tanya를 데리고 집에 왔다. Tanya는 Moskva에서 영어선생을 하던 러시아 여자여서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웃으면서 가벼운 인사들을 주고받는데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I was somebody in Russia, but I’m nobody in Belgium…….”
Tanya는 벨기에에 온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 불어가 아직도 힘들어 Jean-Louis와 영어로 얘기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군. 남의 얘기가 아니다. 가벼운 불어 회화정도가 되면 슈퍼마켓의 계산원 정도의 일이라도 무엇이든 시작하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도 오산이다. 바코드만 찍는 기계가 아니라, 손님하고 동료 하고 예기치 않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이를 불어로 알아듣고 제대로 상황대처를 하지 못한다면, 한국에서 꽤나 똑똑하다는 얘기를 들어왔던 나도 여기서는 경쟁력이 없다.
바로 다음날 시청에서 1주일에 화요일 목요일 이렇게 2회 각 두 시간씩 운영하는 외국인을 위한 야간 불어수업에 등록을 했다. 이 수업은 피난민, 교환학생 등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이유로 이민을 온 사람들에 대하여 해당 거주지에서 이민자의 사회통합에 도움을 주기 위한 수업이다. 개강이 9월이고 학년말 시험은 6월 중순인데, 나는 2월 초부터 학기 중간에 들어가서 이미 진도가 꽤 나가 있었다.
베아트리스 선생님은 아주 친절한 중년 여자 선생님인데, 쉬는 시간에 담배를 연달아 두 개비를 피우고 돌아온다. 등록한 첫날은 옆사람 교재를 멀리서 보면서 어차피 잘 못 알아듣는 것 그냥 선생님 음성만 두 시간 들으면서 앉아 있다가 왔다. 그 다음 목요일 수업에 갔더니, 선생님이 반정도가 복사물로 채워진 큰 파일을 내게 건넨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미 나간 진도 내용을 준비해서 준 것 같다. 오늘부터 나가는 복사물을 다른 학생하고 같이 배포받았고 파일에 끼우니 페이지 차례가 맞다.
그다음 수업부터, 나는 개강 이후 나간 진도, 왕초보 불어 부분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숙제로 채워 갔고, 선생님에게 제출을 하면 그다음 수업때 선생님이 틀린 부분을 고쳐서 돌려주었다. 알고 보니 수업의 앞부분은 한 달이 채 안되어 이전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꽤 쉬운 것이었다. 이후 3월부터 5월 말까지 불어 문법 및 회화, 일기, 쓰기를 했고, 6월 중순의 졸업시험 날짜가 나왔다.
졸업시험 날짜가 내가 한국에 가는 기간과 겹친다. 우리는 4월에 Braine-le-compte 시청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서 엄마 아빠가 오셨고, 리셉션은 시집 정원에서 이 사람의 지인과 시집 친척들이 함께 모였다. 6월 중순에는 한국에서 올릴 결혼식 날을 잡았다. 우리 엄마 아빠가 만나서 약혼하고 결혼하고, 또 우리 오빠의 장례식을 치렀던 창훈대교회에서, 이 모든 가정사를 주관했던 한명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베아트리스 선생님께 졸업시험은 아쉽게도 날짜가 안 맞아서 치를 수 없겠다고 얘기를 했다. 선생님은 공식적인 졸업시험에 결석을 하면 졸업장과 성적표는 줄 수 없겠지만, 내가 원한다면 이 수업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국에서 결혼식 치르고 돌아오면, 자기 집으로 와서 공식버전과 똑같은 시험 문제로 시험을 보겠냐고 제안을 한다. 너무 고맙고 그렇게 하겠다고 3주 후 비공식 시험 날짜와 시간을 잡고, 선생님 주소를 받았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선생님네 집에 적포도주 한 병을 손에 들고 가서 그 집 식탁에서 2시간 동안 시험을 치렀고,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TB (Très bien)이라고 “참 잘했어요”라고 적어주었다. 공식 비공식 이런 건 상관없고, 이렇게 수개월간 함께한 불어입문 수업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신 베아트리스 선생님에 감사하다.
불어 회화를 아무리 잘해도 단어수가 부족하면 유럽언어 몇 가지를 더 보태지 않는 이상 브뤼셀 광장에서 아이스크림 오더 받는 직원보다 못하다. 불어단어를 늘리기 위해 같은 해 9월에 UCLouvain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고, 2003년 2월에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