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 셀린은 구김살이 전혀 없이 밝고 착하고, 둘째 쥬스틴은 어딘가 모르게 경계심이 많다. 큰딸은 자신의 엄마 아빠가 같이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둘째의 경우는 아이가 너무 어렸을 때 이혼을 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함께 생활했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고 죄책감을 느낄 정도여서 아동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이혼 이후에 남자친구를 몇 번 바꾼 전 부인과 다르게, 여자 친구가 없는 아빠를 보며 “아빠는 어떤 스타일에 여자가 좋아?, 저기 저런 여자가 좋아 아님 이쪽에 있는 여자가 좋아?”라고 아이들이 물어본다 하길래 이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갑자기 ‘아, 둘째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간에 헤어지게 된 이유야 어쨌건, 이혼을 하고도 아이들을 책임지는 부모가 장해 보였고, 따로지만 엄마 아빠의 사랑을 계속 받으면서 지내는 아이들이라 다행이었다. 아이들한테는 엄마가 있으니, 해도 안 되는 엄마 역할을 하려고 애쓰기보다 아이들의 믿을 수 있는 어른친구 정도로 지내면서 시간을 준다면 좋겠다는 자신감이 솟았다.
토요일에는 두 딸들과 함께 브뤼셀 Atomium도 가고 바로 옆에 미니 유럽이라는 유럽 각 나라의 대표 명소를 미니어처로 만든 놀이공원에도 다녀왔다. 일요일 저녁에 아이들을 전 부인집에 데려다주고 월요일 아침 우리는 파리로 여행을 갔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샹젤리제, 에펠탑, 까르티에 라땅, 루브르 박물관을 모두 걸어 다녔는데 내 생전에 하루 도보량이 제일 많았던 3박 4일이었다.
파리에서 벨기에 집으로 돌아와서 3일 지내면서 집 근처의 성과 명소들을 둘러보고 이 사람이 좋아하는 승마를 하러 갔다. 이 사람은 어릴 때 승마를 꽤 오래 했는데, 왼쪽 종아리뼈 수술을 받아 지금은 승마를 못하니, 나보고 타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고삐를 잡아 주고 승마장 안을 두 바퀴 돌았는데, 이제는 나더러 잡으라고 고삐를 건넨다. 겁도 없이 받아서 들긴 했는데 말이 착해서인지 아무것도 안 해도 자동시운전을 잘한다. 어느 순간 이 사람이 입으로 무슨 소리를 내니 말이 조금 빠르게 간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트롯 (trotter)이라고 하는 것으로, 걷기 (marcher)와 달리기 (galloper) 사이의 단계란다.
고삐를 좀 더 타이트하게 잡으라고 하더니 또 무슨 명령을 내린다. 갑자기 말이 달리기 시작한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나는데 속도감이 시원하고 말과 내가 하나가 되어 한 리듬을 타는 게 참 묘하게 신났다. 무엇보다 내가 말에서 떨어질까 걱정스러웠던 것인지, 아님 내가 이 사람 눈에 유독 이쁘게 보였던 것인 것인지, 말 타러 가자고 해놓고, 정작 자기는 안 타고 말 타는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이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음날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벨기에 북쪽의 브뤼헤에 다녀왔다. 고풍스러운 중세 운하 도시에 햇볕 가득한 날씨까지 더해 참 아름다웠다. 골목골목 거닐고, 운하를 지르는 배를 타면서 어느새 우리 둘은 손을 꼭 잡고 있다.
휴가 받은 2주는 쏜살같이 지나가고 이틀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내가 있었던 2주 동안 이 사람도 휴가를 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사람은 중동으로 출장을 떠난다. 내게 아무런 연고가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땅에서, 출장 많은 이 사람만을 보고 여기 와서 살 수 있을까. 자신의 부재로 이혼의 소지를 제공했다고 자책하는 이 사람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면 안 되는데.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 부모님과 한 달간 매일 저녁 토론의 시간을 갖었다. 아빠는 무조건 딸을 믿는다고 했지만, 엄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오빠도 천국 가고 없는데, 나마저 너무 먼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게다가 잘 키웠다고 자부하는 딸을 아이가 둘 딸린 이혼남에게 보내는 것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일부러 겪으려고 하지 않아도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많은데, 미리 눈에 훤히 보이는 몸과 마음의 고생은 제발 피해가기를 바라는 게 부모의 마음이리라.
매일 엄마는 새로운 반대 의견을 내놓았고, 아빠는 묵묵히 듣고 있었고, 나는 이러 저런 이유로 극복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했다. 변호사 변론시험 보듯, 논리 정연한 우리 엄마는 하나하나 반대의 내용과 이유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충분히 대답을 했을 때, 여느 부모님들이 내놓을 카드가 떨어지면 한 번은 내놓을법한 “하여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돼”라고는 다행히 말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의 새로운 반대소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토론의 나날들을 지내고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 응. 나는 그저 그런 새 바이올린보다, 중고지만 소리 좋은 스트라디바리우스 가 더 좋아.
- 그 사람이 너한테 스트라디바리우스 야?
- 네, 참 좋은 사람이에요.
- .................(10초의 침묵)............. 그래 그럼. 행복하게 잘 살아.
엄마랑 나는 그날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펑펑 울었다.
다음날, 이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드디어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고, 1월 안에 벨기에로 가겠다고 했다. 회사에는 본 출간건을 마치고 12월 말 부로 사직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날 저녁, 미지의 삶으로의 선택이 맞는 것이라고 응원하는 듯, 아주 오래간 만에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