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유부녀가 되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지도 없이 새로운 지형의 길을 걸어가며 매 갈림길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다. 보통의 인생도 그러하겠지만. 결혼하면서 동행자(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더 고생이 될 수도 있는)가 생긴 것은 큰 차이였다.
우선 어디서 신혼생활을 시작해야 하는지부터 공동체원을 고려해야 했다. 신랑이 근무하는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고충신청서를 냈다. 통상 수도권으로 오길 바라는 직원들이 많으므로 강원도로 가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원하는 관서에 맞는 직급의 자리는 연말 인사이동 대상이 아니어서 배치가 어려웠다. 많은 배려로 그 옆 세무서로 발령이 났다. 남편 직장과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인사이동 발표날 전화기에 불이 났다. 왜 강원도로 날아간 건지(너무 먼 곳이라 울면서 배치받고, 막상 떠날 시점이 오면 떠나기 싫어 울면서 나온다는 곳이니) 걱정해 주는 많은 감사한 분들의 전화였다. 결혼을 앞두고 신랑 직장 근처로 간다고 이야기하니 '왜 거기까지 가는 거야? 주말에만 봐도 될 텐데.'
그러게요
허니문베이비가 생겼다. 계획하지 않아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속이 안 좋아 간 병원에서도 지금은 피검사로도 알 수 없는 때라고 했다. 몸은 달랐다. 버스를 이십 분 이상 탈 수 없었다. 잠도 많이 왔고, 속도 울렁거렸다. 하루 종일 숙취가 계속되는 상태였다. 이주 뒤에 간 병원에서 드디어 임신임을 확인해 주셨다. 그렇게 결혼하자마자 생긴 아이 태명은 일찍이가 되었다.
임신을 하니 술도 마실 수 없었다. (물론 용감하신 우리 사장님*께서는 마셔도 된다고 하셨다.) 우리 지점*에서는 그 지역 특성에 맞는 활쏘기 동호회도 있었다. 임신 달 수가 늘어나면서 동호회에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운동삼아 거의 막달까지 참여하게 됐다. (그때도 지금도 직원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출근할 때면 몸이 천근만근이어서 출근길이 어려웠지만 직원분들을 뵈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를 힘이 생겨 아이를 낳기 전까지 마음 따뜻한 그 지역에서 근무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아이가 크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힘들던 시절 함께 해주셨던 감사한 분들이 하나 둘 생각난다.)
* 국세청을 싫어할 수 있는 많은 분들 앞에서 일각에서 세무서를 부르는 전문용어: 지점, 서장님: 사장님
기본적인 식습관,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몸도 변해갔다. 입 주변에 습진이 생기며 피부가 벗겨졌다. 체형도 달라졌고 신체 기능이 반으로 떨어지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잠이 쏟아졌다.
친애하는 남편은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다니던 직장을 다니며 먹고 싶은 음식, 마시고 싶은 커피도 가릴 필요가 없었다. 회식 자리는 물론이고 당연히 전과 같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반들반들 얼굴은 날이 갈수록 빛을 뿜어냈다. 불공평하지 않은가.
결혼하면, 아이가 있으면,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