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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Sep 22. 2023

월간지 마감이 만들어준  남편과의 인연

 

   본격적으로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맨 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졌다. 나무는 옷을 벗고 가벼워지고  우리는 옷을 덧입어  무거워지는 계절.


  오늘 아침 남편에게 연한 감색의 로가디스 봄가을 재킷을 내어주었다. 몇 년 전 내가 생일선물로 사 준 옷이다. 백화점에서 일할 때였는데 유니폼을 입고 옷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을 나이 드신  어르신 고객이 한참을 보시더니 에고... 돈 벌어서 남편 옷 사주네...기특해라... 하시며 꼭 당신 며느리 보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때 왜 딸  보는 듯한 미소가 아니라 며느리 보는 듯한 미소로 보였을까. 아마도 어르신 생각에 딸이 돈 벌어  사위 옷 사주는 것보다 며느리가 돈 벌어 당신 아들 옷 사 주는 행위가 더 흐뭇하시겠지 싶어서였을 것이다. 나의 그런 짐작은 대체로 맞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나의 노동의 댓가로 돈을 벌고  누군가를 위해 그 돈을 쓰는  기특한 생활이 살짝  그립기도 했다.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올 수 없을 듯 한 날이기 때문이겠지...


   그 재킷을 계기로 오랜만에 기억이 더 먼 과거로 달음박질쳤다.   남편과의 첫 만남으로까지...


  내 나이 스물일곱 되던 해 2월이었다. 그때 난 작은 언론사 월간지의 취재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연예 스포츠 관련 주간신문 한 개와 월간지 두 개를 만드는  회사였다. 내가 만드는 월간지는 화재의 인물  막 뜨기 시작한 신인 연예인 평범한 생활인의 수기  독자의 사랑 수기 책과 영화 소개 건강정보 등을 싣는  교과서  판형의 교양지였다. 독자들에게서 오는 수기는 극히 드물어서 대부분  취재기자 둘이 한달에 거의 한두개씩 썼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그 달에는 기사 마감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유독 인터뷰가 잡히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해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드디어 인터뷰할 물을 찾아냈다. 환경미화원이 새벽에 청소를 하다가 불난 집을 발견하고 뛰어들어가 사람을 구해낸 기사가 신문 한  귀퉁이  미담  코너에 실려 있었다. 사실 우리 월간지그리 맞는 인물은 아니지만  맞는 인물로 써보면 될 것 같았다. 주로 개인사를  파고들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계기로 환경미화원이 되었으며  조심스럽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직업을 어떻겨 보는지 뭐 그런 쪽으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환경미화원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청소부로 불렸으며 그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지금과 많이 다를 때였다.

  신문사에 전화를 해서 그분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그분과 통화해서 인터뷰 허락까지 받았다. 그분은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그날 나는 기분이 별로 안 좋고 몹시도 피곤했다. 아마도 전날  술을 많이 마셨을 것이다. 그 때가 그런 때였다.


   친구들의 결혼소식이 자주 들려오는 나이였다. 한두번의 연애는 미적지근하게 끝나버렸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장대하리라고 호기롭게 시작한 잡지사 기자 일도 점점 자신이 없어져 갔다. 의욕만  있을뿐 나태하게 생활하면서 변방만 떠도는 한심하고 하찮은 인생으로 끝날것 같은 좌절감에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그 당시엔 정말  술과 담배를 많이 했다. 술은 물론 담배도 창작과 고뇌와 우수의 상징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기분인데다가 그분이 알려준 집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오래된 가 골목길을 한참 헤매야 했다. 날씨도 춥고 우중충했다. 하지 말까 솔직히 월간지에 어울리는 인물도 아닌데... 안 하면 어쩔 거야? 마감은 해야 할 거 아니냐구....아아 짜증 나...

  

  그런 맘으로 춥고 낯선 골목을 돌아다녔지만 결국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전화를 하려고 조그만 동네 가게의 담벼락에 붙어 있는 주황색 공중전화기  앞으로 갔다. 그런데 아뿔싸.... 그분의 전화번호가 적힌 취재노트를  가져오지 않았다. 아 이건 하지 말라는 뜻이야 하지 말자 하지 마...

  

  무엇이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 나는 진짜 포기하고  돌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또 돌아가서 또 취재원 찾고 전화하고 허락받아내고  할   일을 생각하니 또  발걸음이 멈춰졌다. 시간이 없었다.  마감이 코앞인 것이다.


  결국 회사에 전화해서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다시 그분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겨우 집을 찾아 들어갔다. 오래된 빌라의 일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표정을 밝게 바꾸고 그분의 집  거실로 들어서니 거기엔 이미 기자로 보이는 두 분과의 인터뷰가 진행 중이었다. 처음 드는 생각은 그냥 가버릴걸... 하는 후회였다. 이름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월간지이고 무엇보다 가방 안에 든 작고 오래된 구형의 카메라 때문이기도 했다. 회사의 재정상 고급진 카메라가 없을뿐더러 한 명 있는 사진기자는 신문 소속이었으며 늘 바빠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인물취재 후 사진을 찍을 때면 그 창피함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려고 우리 사진기자가 바빠서... 하고  묻지도 않는 핑계를 댔다. 그래도  가방에서 구닥다리 작은 카메라를 꺼낼 땐 늘  좀 창피해서 직업에 대한 회의까지 들었다. 물론 처음 잡지사에 발을 들여놓을 땐 열심히 열심히 해서 두껍고 고급지고 톱스타들을 상대하는 여성지로 옮겨가리라 야무진 마음을 먹었지만 속된 표현으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알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하기보다 회의와 무력감 패배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심하고 하찮은 인간이었다.


  두 남자는 ㅇㅇ 일보사에서 나왔다는데 한 명은 인터뷰를 하고 한 명은 사이사이  묵직한 카메라로 렌즈를 길게 빼서 한참 촛점을 맞추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남자는   머리숱이 적고 얼굴과 머리가 동글동글한 남자였고 목소리가 가늘었다. 사진을 찍는 남자는 덥수룩한 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썼고 목소리가 굵고  얼굴선이 날렵했다.


   기자분들은 청소노동자로서의 근무조건이나 직업상의 애로사항이나 개선사항 나아가 쓰레기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에 중점을 두고 인터뷰를 했다. 그들의 인터뷰가 끝난 후 나도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두 기자는 가지 않고 있었다. 인터뷰가 얼추 끝나고 사진기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사진을 찍던 기자가 아는 체를 했다.

  인물 사진을 그렇게 증명사진 찍는 것처럼 찍으면 안 돼요 줘  보세요... 자... 기자님은 인터뷰하세요...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는 거예요... 그래서 인터뷰 때도 사진기자가 꼭 필요한 거고...

 

  아 우리도 사진기자가 있는데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


아마도 나는 이런 핑계를 댔을 것이다.


  셋이 그분의 집을 나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골목길을 한참 걸었다. 흐리고 추운 날이었다. 버스정류장인지 전철역인지에 가까이  왔을 때 사진기자가  같이 밥을 먹고 헤어지자고 제안했다.

셋은 중국집에 갔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사진을 찍어주며 잘난 체하던 남자가 사실은 자기도 취재기자라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가끔 사진기자 노릇도 한다고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묵직한 목소리에 말투가 투박한듯 구수하다 했더니 부산이 고향이라고 했다.


어머... 나... 부산 좋아하는데... 바다 있어서요... 제가 20년을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아서 늘 바다가 그리웠거든요...


내가   좀 흥분해서 그렇게 얘기했던가...


다음날 퇴근 무렵 사진 찍던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ㅇ기자님...이번주  주말에  부산 가는데 같이 갈래요?

  

  살면서  나를 실망시키고 힘들게 할 때마다 그 골목길을 떠올렸다. 그때 그 골목길에서  돌아섰어야 했는데...애초에 그 골목길에 가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몇 번이나 돌아갈 기회가 있었는데 왜 ....


  그러면 남편도 말했다.

  

  나야 말로 거기 안갈걸 그랬어...다른 취재도 있었는데 그 기자가 굳이  나한테 같이 가 달라고 부탁 하잖아... 몇번이나  거절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부탁을 해서 할 수 없이 따라 간 거였어...끝까지 거절하는건데 왜 갔나 몰라...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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