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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Sep 17. 2023

나는 정녕 인생을 쉽게 안락하게 보내고 싶지 않단말인가

  토요일 오전 11시 수원에 사는 동창 경의  딸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수원 인천 안양 의왕 시흥 등 주변에 사는 동창들은 거의 다 참석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시골 출신들 답게 동창회가 많이 활성화되어 있다.

  나는 오전근무( 오전 10시 – 오후 5시) 날이어서 참석할 수 없다고 말해뒀다. 아무도 나의 퇴사를 모르니까.

사실은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될 동창이었다. 꼭 참석해야 할 절친이면 근무를 바꿔서라도 연차를 내서라도 참석했을 것이다. 물론 재직 중일 때 말이다.


  그래도 일단 가까이에서 결혼식이 있고 주변에 그 동창보다 좀 더 친밀한 동창들도 다 간다 하고, 그중엔 아주 절친한 친구 희도 가기 때문에 나 같은 성향(?)이 아니라면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참석하기 싫었고 그래서 근무라고 했다. 참석을 하면 축하해 주고 사진 한 두 장 찍고 점심 먹고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2차 3차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희는 며칠 전부터 음성에 사는 진이 경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러 올라온 김에  나도 만나고 내려 가고 싶다면서 5시 퇴근하고 수원으로 와서 진이랑 만나자고 했다. 내 전 직장과 수원은 버스로 30분 거리다. 진은 다른 동창들보다는 좀 더 친밀한 동창이다. 나는 그럴 것까지 없다고, 식 끝나고 니들끼리만 빠져나오기가 쉽겠냐고 그냥 참석자들하고 끝까지 어울려 놀라고 했다. 그래도 희는 진이 통화에서 나를 꼭 보고 가고 싶단다고, 일단 근무 끝나고 수원으로 올 생각을 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데 거절하기는 좀 그랬다. 이럴 때 나는 꼭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뭐라고…. 나는 그러니까 자존감이 좀 없는 편이다. 몇 번 거절하다가 자꾸 요구하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뭐라고… 별거 아닌 나를 이렇게까지 만나고 싶다는데… 이렇게까지 참석하기를 바라는데… 비록 말로만일 지라도….

내키지는 않지만 그러마고 했는데 오늘 오전에 진이가 독감이 걸려서 못 올라온다는 경의 톡이 왔다. 잘됐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일단 결혼식 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섯 시에 퇴근이라는 걸 아는 희가 혹시 결혼식 뒤풀이가 일찍 끝나서 나의 직장 근처에서 보자고 할까 봐 집 근처 도서관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옛 직장과 가까운 사당역의 복합쇼핑센터 '파스텔시티'에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좀 주도면밀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2시쯤 도착해서 일단 영풍문고에 들렸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지나다니면 어깨가 부딪치고 도서검색용 PC로 도서 검색을 하고 있으면 금방 내 뒤로 한두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떠들썩하게 책을 고르는 가족들도 있고 친구랑 와서 이 책 저 책 수다 떨며 뒤적거리는 사람도 있고 조용조용 속삭이며 책을 고르는 커플도 있었다.

   특히 벽의 붙박이 서가의 외국소설 코너 앞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펼쳐 놓고 선 채로 열심히 메모를 하는 구부정하고 조그마한 어르신이 눈길을 끌었다. 교과서 판형 메모지를 놓고 볼펜으로 깨알같이 메모를 하며 꽤 오래 서 계셨다. 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아마 망설임 없이 자리를 양보해 드렸을 것이다. 그 옆의 외국 고전문학 코너에도 젊은 여자애가 선 채로 오래 책을 읽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나는 작가'최은영'의 신간‘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김영하 북클럽 선정도서’라는 광고문구가 붙은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를 구매했다. 내가 진짜 사고 싶었던 ‘다시, 올리브’ 책은 검색해보니 이 서점에는 없었다.

  

  집을 나오기 전에 비도 오고 해서 오징어김치전을 부치면서 많이 먹어서 배는 고프지 않았다. 책 두 권을 사 들고 카페가 모여 있는 1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런데 카페마다 자리가 없었다. 통유리 안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혹시나 싶어 문을 열면 여름날 논에서 나는 개구리소리처럼 와글와글 대는 소리가 덮쳐왔다. 가끔 자리가 있긴 했지만 서너 명이 앉는 테이블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에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있을 만큼 나는 낯이 두껍지도 배짱이 있지도 않다. 정말로 1층의 카페 서너 군데를 돌아다녀 봤지만 마땅한 자리가 한 개도 없었다. 오징어김치전을 많이 먹어서인지 갈증도 심하게 났고 날씨는 흐리고 습도는 높아서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후텁지근했다. 거리로 나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을 하려 했지만 거기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없이 편의점에 들어가 컵얼음에 파우치커피를 부어 들고 나왔다. 인도의 모퉁이에 마련된 벤치에도 앉을 곳이 없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봐 둔 3층의 식당 앞에 대리석 의자가 많은 넓은 대기실을 생각해 냈다.


  커피를 들고 3층에 올라갔다니 세상에… 그곳도 완전 만원이었다. 대부분 아니 거의 다가 중년이 넘은 세련된 여노인들이었다. 거기도 1층의 카페 못지않게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얘기를 하다 보니 개별적인 얘기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형체도 흐릿한 천정에 닿을 듯한  커다란 덩어리가 웅웅 거리며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나는 일단 조금의 여유가 있는 끄트머리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수록된 단편 하나를 읽었다. 단편집은 차례로 읽지 않고 골라서 읽기 때문에 세 번째 수록 작품 ‘몫’을 읽었다.


  경의 딸 결혼식에 참석한 희는 결혼식 끝나고 2차를 간다는 톡을 보냈다. 2차는 술을 곁들인 노래방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조금은 서먹서먹하던 처음의 분위기는 다 풀어지고 그야말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출 것이다.  가수 송창식의  ‘고래사냥’ 노래가사처럼. 송창식의 ‘고래사냥’ 노래 가사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 다 돌아앉았네….

 

  나는 이 가사가 참 공감이 갔고 좋았다. 내가 늘 그랬으니까….

  한 때는 노래방에 갈 때마다 음치인 대다가 술을 마시고 이 노래를 고래고래 불러재껴서 마이크를 몇 번 빼앗기기도 했었다.


  내가 대리석 끝에 겨우 엉덩이만 걸치고 책을 읽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가고 또 와서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목소리가 큰 사람 서넛이 와서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는 바로 옆이라도 그렇게 개별적으로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다른 얘기소리와 섞여서 웅성웅성, 정도였는데.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여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데서 무슨 책을 읽고 ㅈㄹ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1층 카페 거리로 나가 보았다. 여전히 자리는 없었고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글대는 것 같았다. 나처럼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이동하는 무리들도 보였다. 나는 이곳저곳 느릿느릿 터덜터덜 기웃기웃거리다가 영풍문고 입구에 엉덩이 모양처럼 만들어놓은 동그란 의자를 발견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곡선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양 쪽으로 네 개씩의 의자가 있는데 한쪽에는 중년의 여자들 네 명이 앉아 떠들고 있고 또 한쪽에 한 명의 남자만 앉아 있고 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냉큼 거기 가 앉았다. 그리고 책을 펼쳐 들고 읽었다. 에어컨 바람이 없는 지하라 후텁지근했지만 나는 손수건을 꺼내 콧잔등의 땀을 찍어내면서도 최은영 작가의 단편 ‘답신’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열악한 곳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 최은영 작가는 정말 대단한 작가가 아닌가.


  동창밴드에 노래방에서 놀고 있는 사진이 스무 장 가까이 올라왔다. 테이블에는 술과 음료와 안주들이 즐비하고 테이블 옆 소파에는 앉아서 손뼉을 치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둘이 아마를 맞대로 무슨 얘긴가를 나누는 동창들이 있고 마이크를 잡고 모니터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동창이  있고 서서 손뼉을 치며 춤을 추는 동창도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해서 최대한 나이가 보이지 않게 찍히려고 턱에 손으로 꽃받침을 하든가 뽀샵을 한 얼굴과 무방비상태로 찍힌 얼굴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아무 표정 없이 있다가 찍힌 얼굴에는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입가가 처지고 턱밑이 두껍고 어딘가 고단해 보이는.


  오후 여섯 시가 넘었다. 배가 고팠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싶었다. 다시 1층에 올라갔다. 어둑어둑한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신히 테이블이 몇 개 비어 있는 베이커리카페에 들어갔다. 진열장 안에 있는 빵의 반 이상이 팔려나가고 비어 있었다. 대파바게트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놓고 창가자리에 가 앉았다. 테이블에 ‘여기는 3 - 4인용 자리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자리 이동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주위에 서너 개의 빈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았지만 자주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아야 했다.


  희가 ‘2차 노래방에서 놀고 3차로 해장국집에 왔다 좀 취했다’라는 톡과  이어서

‘좀 조신하게 보낼라 했는데 …  '라는 톡이 연이어 왔다.

  나는 ‘안 취했네… 오탈자가 하나도 없는 거 보니…ㅎㅎ ‘ 하고 보냈다.

  이어서 ‘희 너는 조신한 게 트레이드마크였는데…. ㅋ’라고도 보냈다. 나는 음주가무를 졸업하려는데 최근의 희를 보면  뒤늦게 음주가무에 입문한 것 같았다. 나는 참석하지 않는,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경조사에도 꼬박꼬박 참석을 하고 몸에 받지도 않는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괴로워하는가 하면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더라는 말도 들려왔다.

 

  유리문 밖에서 화단의 키 작은 나무들이 네온 불빛을 받으며 비를 맞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선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를 읽었다. 소설가 김영하의 ‘그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어 갇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라는 말에 이끌려 선택한 책. 두 시간 가까이 빠져들어서 읽었다.

  

  오후 8시 무렵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지하철 파업으로 운행시간이 지연된다는 방송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서 선 채로 ‘완벽한 아이’를 읽었다. 희가 카톡에 ‘이제 집 가는 중’이라고 보냈다. ‘참 오래도 놀았네…” 하고 내가 답톡을 보냈다.


  잠이 오지 않는 상태로 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니체’인지 ‘쇼팬하우어’인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책을 찾아볼 수는 없고 폰을 켜고 겨우 띄엄띄엄 기억나는 문장  군중과 함께 있으라,  정도를 입력해  보았다. 무리짓지 않고, 같은 문장도 생각나 입력해 보았다.


  겨우 찾았다.


  니체가 한 말이었다.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나는 정녕 인생을 쉽게, 안락하게 보내고 싶지 않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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