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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지독한 사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와 소설 '구의 증명'

by 찌니

거의 한 달 만에 혼자서 수리산에 다녀왔다. 4호선 수리산역에서 시작하여 무성봉 임도오거리 슬기봉을 지나 태을봉 정상(489m)에 도착, 김밥 한 줄과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노랑바위를 지나 태을초등학교 쪽으로 하산했다.

초가을의 산은 나사가 반쯤 풀린 텅 빈 가구처럼 헐겁고 수선스러웠다. 작은 바람에도 마른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고 다 여문 도토리가 수시로 투두둑 툭툭 나뭇가지에 부딪치면서 떨어졌다.


슬기봉에서 태을봉 가는 길에 늘 내가 앉아서 쉬는 곳이 있다. 등산로에서 벗어난 표면이 고르지 않은 평평한 바위인데 산줄기에서 다이빙대처럼 공중에 돌출되어 있다. 한여름에 그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빈 틈 하나 없이 빼곡히 들어찬 녹음이 초록색 푹신한 카펫처럼 보인다. 초가을인 그날은 색도 바래고 털도 좀 빠지오래 된 카펫 같았다.


거기 앉아 고개를 들고 부쩍 가까워진 하늘과 멀고 가까운 산맥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년 개봉 이병헌, 고 이은주 주연)'가 생각났다.

"여기서 뛰어내려도 끝이 아닐 것 같아...."

태희(이은주)와 인우(이병헌)가 산에 올라갔을 때 태희가 이렇게 산의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말이다.

이 말은 비단 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절벽 그러니까 삶에서 뛰어내려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그건 그들의 사랑, 이었다.


인우는 대학에서 우연히 태희를 본 후 첫눈에 반해 태희의 관심을 사려는 온갖 유치하고 간절한 노력 끝에 커플이 된다.

인우의 입대 날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한 태희는 용산역으로 향하던 길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인우는 태희의 죽음을 모른 채 태희를 기다리다가 기차를 타고 가 입대한다.

17년이 지난 후 다른 여자와 결혼한 인우는 국어선생님으로 부임한 고등학교에서 태희를 연상시키는 남학생 현빈(여현수)을 만난다. 현빈은 태희처럼 음료를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펴고 태희의 얼굴이 새겨진 라이터를 가지고 있고 숟가락의 받침은 왜 디귿이냐고 태희가 물었던 질문을 한다.

현빈에게서 태희를 느낀 인우는 현빈을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현빈에게 자주 관심을 드러낸다. 결국 인우는 호모라는 놀림과 동성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학교를 그만둔다. 뒤늦게 자신이 전생에 태희였음을 깨닫게 된 현빈이 인우를 찾아 용산역 플랫폼에 가고 거기서 태희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인우와 재회한다.

둘은 잠시 여행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뉴질랜드의 번지점프대에 올라 밧줄에 발목을 묶지 않은 채로 뛰어내린다.


현빈(태희) : 다음번엔 여자로 태어나야지

인우 : 나도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

현빈(태희) : 그럼 또.... 사랑하지 뭐.....


이 영화는 몇 번을 본 것 같은데 언젠가 현빈의 캐스팅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자인 태희의 환생이니까 남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작고 아담한 남자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등치가 이병헌보다 큰 배우를 캐스팅한 것이 잠깐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또 탁월한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자신이 전생에 태희였음을 알고 인우를 찾아가 잠깐동안 데이트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키도 등치도 큰 현빈이 인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는 뒷모습이 나온다. 나이도 훨씬 어린 고등학생 현빈이 오히려 가정과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외면당한 인우를 성숙하게 위로하고 안아주고 보호해 주는 느낌이랄까...

또다시 무력하게 이끌리는 사랑으로 괴로운 인우가 자신보다 등치도 키도 크지만 천진하고 앳된 남학생일 뿐인 현빈을 붙들고 나는 너를 느끼는데 너는 왜 나를 못 느끼냐고 울부짖는 장면도 나온다. 처음에는 몰입도 안되고 솔직히 약간 억지스럽게도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렇기 때문에 더 절절하고 애틋하고 비극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소설이든 영화든 자신의 감정선을 건드렸다면 두세 번은 읽고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수리산에 갔다 와서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을 다 읽어갈 즈음 문득 산에서나 떠올리던 '번지점프를 하다' 영화가 생각났다. 두 작품 모두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담(소설의 여주인공)은 할아버지한테 길러지다가 할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는 이모에게 길러진다. 구(소설의 남주인공)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사채빚을 떠 앉게 되어 학업도 포기하고 밤낮없이 일을 해 보지만 악랄한 사채업자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불운한 구와 담은 어릴 때부터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린다.

자신의 가혹한 삶에 담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구는 어떻게 해서든 담을 멀리해보려 하지만 담은 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구는 담과 함께 시골에서 시골로 도망쳐 다니다가 결국 사채업자들에게 붙잡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후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쓰러져 죽는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라는 글을 책의 뒷 표지에서 읽고도 나는 '나는 너를 먹을 거야'를 진짜 먹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독한 사랑의 상징적인 묘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스럽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은 연인 구의 사체를 담은 진짜로 조금씩 조금씩 야금 야금 파먹는다. 얼마나 사랑해야 그럴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 같은 괴기스러운 행동이지만 그것도 사랑의 한 방법이라는 데 어쩌랴....



쇄골까지 내려온 구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니 푸석한 머리칼이 한 움큼 빠졌다. 손에 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버릴 수 없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


구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죽으면 우리의 시체는 어떻게 되는가. 누가 우리를 거두어 줄 것인가. 공무원이 우리를 가져가 태우겠지. 가져갈 때도 접수할 때도 태울 때도 구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가 나에게, 나에게 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 몸에 새겨진 기억과 추억 같은 것…. 상상하지 않겠지. 죽은 동물 몸이 그리 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구를 그리 둘 수는 없다.


…………………..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 너무 사랑하지는 말자. 적당히만 사랑하자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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