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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얼굴엔 흰 수염이 덥수룩하고

고립과 비밀의 시간들

by 찌니


뭔가 불안하고 화가 잔뜩 난 내가 어느 집의 계단을 쿵쿵거리며 올라가 두껍고 큰 문을 열어젖힌다. 방 안엔 친구 경과 희와 철과 성인이 된 후에는 만난 적이 없는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또 한 명의 동창이 둘러앉아 있다. 내가 문을 열어젖히자 그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본다. 나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짐작한 내가 화를 내며 뭐라 뭐라 따진다. 희와 철은 마네킹처럼 굳은 얼굴로 이 모든 건 다 나의 잘못이라고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말한 후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리고 경은 미안하다며 나를 붙잡고 운다.


희뿌윰한 새벽에 잠에서 깨어 가물가물하게 멀어져 가는 꿈의 기억을 잡아당겨 겨우 되살려 냈다. 지난 9월에 주말을 이용해 어디라도 떠났다 오자는 제의를 내가 근무를 핑계로 거절했다. 그렇게 거짓말로 거절한 것이 마음 한 곳에 불편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자고 이렇게 나는 자꾸 스스로를 고립시키는가…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길인가…


7일째 연휴를 보내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흰 수염으로 덮여 덥수룩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은 수염 사이에 흰 수염이 드문드문했던 것 같 같은데 오늘 보니 흰 수염 사이에 검은 수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루만 면도를 하지 않아도 검은 수염에 뒤덮이던 당신의 날렵하고 탄력 있던 젊은 얼굴이 이제 가물가물하네... 난 당신의 하루나 이틀 면도하지 않은 그 덥수룩한 얼굴을, 손으로 만지거나 얼굴을 부비면 까끌까끌하던 그 감촉을 많이 좋아했었지....


우리.... 오래도 같이 살고 있구나… 참… 힘들고 어려웠는데…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데 거실 티브이에서 구성진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인지 전에는 들리지 않던 트로트가 집안 가득 흐르고 있을 때가 가끔 있다. 불린 미역과 소고기를 볶은 후 물을 부어 끓여 놓고 거실에 가 보았다. '추석특집 가요쇼'라는 타이틀 아래 가수 김연자의 열창하는 얼굴과 눈물을 찍어내는 나이 든 방청객의 얼굴이 번갈아 클로즈업되어 나오고 있었다. 김연자의 매끈하고 화사한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 지 모를 액체에 뒤덮여 번들거렸다. 특유의 제스처와 풍부한 감정으로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거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리를 토해내고 있는 듯했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들썩이는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어매 어매 뭐할라고 날 낳았소

뭐할라고 날 낳았소....


그 흥얼거림 끝에 나는 이렇게 낮게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라고 낳으셨소...이렇게 살라고...



소고기미역국으로 아침을 함께 먹고 새로 생긴 베이커리 카페 '밀ㅇ당'에 가기 위해 12시 무렵 집을 나섰다.

'밀ㅇ당'은 베이커리 카페이고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규모가 큰 베이커리 카페는 대부분 경치가 좋은 야외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주택가에도 들어와 있다. 그것도 집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생겼고 야외나 바닷가의 웬만한 카페보다 훨씬 넓다. 나는 3일 전에 투썸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산책을 하고 싶어 일부러 먼 길을 선택해 걷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1층에는 카운터와 각종 빵이 길게 진열되어 있고 창가로 테이블이 놓여 있다. 2층은 '아무나 카페'다. '아무나, 아무 때, 아무 곳'이라는 글씨가 벽에 붙어 있다. 강당처럼 넓고 이인용 사 인용 원목 테이블과 둥근 테이블과 6명에서 10 명까지 앉을 수 있는 소파형 테이블도 있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공간이 넓어서 가끔 아이들이 포크에 빵을 꼽아 들고 뛰어다니기도 한다. 분위기는 시끄럽고 어수선하지만 그만큼 자유롭고 오래 앉아 있어도 부담이 없다. 커피도 한 잔이 3500원이고 출출하면 1층에 내려가 빵 하나를 사 와서 먹으면 된다.

남편과 아들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당분간 말하지 않을 참이다. 다행히 아파트 뒤쪽 천변 건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이쪽으로 산책을 나오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을 위치다. 바로 옆에 주유소가 있어서 주유소를 이용하러 왔다가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이 휴관인 월요일이나 법정공휴일에 이용하기 좋은 이 공간을 당분간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하늘은 흐리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오늘은 걸어오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지 했는데 겨우 10분 정도 걸어왔다고 몸이 후끈한 듯하여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날이 저물고 빛들이 사위어 공원 숲은 먼 안쪽까지 들여다보였고 나무들 사이가 깊었다. 처서를 지난 초가을 공기가 말라서 가벼웠다. 숨을 들이쉬면 날이 선 공기 한 가닥이 몸 안으로 빨려 들어와 창자의 먼 끝쪽에까지 닿았다. 국수를 한가닥씩 빨아 당겨 삼키는 것처럼 공기는 한올씩 갈라져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가을빛이 완연한 길을 걸어오면서 오디오로 들은 김훈의 단편소설 ‘강산무진’의 일부분이다. 내가 걸어오면서 느낀 초가을 바람을 저토록 섬세하고 투명하게 표현한 것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얼마나 오래 집요하게 집중하여 느끼고 들여다보아야 저런 표현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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