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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의 결혼기념일은 어떠십니까?

by 정유쾌한씨

8주년 결혼기념일(이하 결기) 아침, 남편과 나는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리 부부는 결기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선물은 주고받지 않는다.


매년 무엇을 먹었는지 다 기억나진 않지만, 3년 전까지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었던 것 같다. 최근 몇 년간은 고기 뷔페나 냉동 삼겹살집을 갔다. 어느 순간부터 결기에 낭만이 빠졌다.


오늘도 남편은 고기 뷔페에 가고 싶다고 했고, 365일 다이어터인 나는 오늘은 고깃집에 가자고 했다. 고기 뷔페에 가면 이성을 잃고 고기를 너무 많이 먹을 것 같았다. 남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퇴근하고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대패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대패삼겹살 대신 생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이 곳은 고기를 100g 단위로 주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목살 200g, 오겹살 200g과 계란찜을 시켰다. 나는 고기와 생마늘을 넣은 상추쌈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명색이 결기인데 너무 건조하게 고기만 먹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생마늘 먹은 입으로 “자기야, 결혼기념일 축하해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상추쌈을 입에 가득 문 채 미소 지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실망할 것 같아서 우리는 고기 200g을 추가 주문했고, 셀프 볶음밥을 볶기 위해 100g을 더 시켰다.


고깃집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 불을 기다렸다. 남편은 고기 뷔페보다 여기에서 고기를 더 많이 먹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민망한 나머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8주년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우리 80년 더 살아요, 푸하하!”라고. 고기를 많이 먹어서 고기에 취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평소처럼 거실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기역자형 소파 끝과 끝에 앉아 남편은 TV를 보고, 나는 책을 읽었다. 잠시 후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앉은 채로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봤다. 갑자기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았다.


‘결혼기념일을 이렇게 보내도 괜찮은 걸까?’


결혼 전에는 ‘결기’하면 줄무늬 남방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와 쉬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와인 마시는 모습을 떠올렸다. 낭만이 가득한.


삼겹살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부부의 모습도 나름 낭만 있지만, 츄리닝을 입은 여자가 생마늘을 먹은 입으로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모습은 내가 상상해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계속될수록 내 마음도 드렁거렸다. 결기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좀 더 의미 있는 결기를 보내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까. 다른 부부들은 결기를 어떻게 보내는지도 궁금했다.


며칠 뒤, 남편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자기야, 자기야! 이리 와 봐요!”


잰걸음으로 거실로 갔다. 남편은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곳엔 8년 전 우리의 모습이 있었다. 신혼여행지에서 브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젊은 우리. 휴대폰이 사진 여러 장을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머리를 옆으로 맞대고 동영상을 함께 보았다. 잊고 있던 우리의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동영상을 보며 ‘그래, 이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년 결혼기념일에는 결혼식 때나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남편과 함께 봐야겠다고. 생각보다 낭만은 가까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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